(Return) 
(Return)
장편소설 4회
달그림자
손 정 모
4. 수련 기간(修練期間)
안개 노인은 실핏줄처럼 스며드는 석양의 잔영(殘影)들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짧은 한숨을 토했다. 그러더니만,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뭔가 나지막한 음절들을 뱉아 내고 있었다. 여인과 나는 노인의 사색의 순간을 방해할 수 없어,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질식할 듯한 분위기가 동굴 안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마침내 노인은 현실로 돌아온 듯,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안색을 가다듬었다. "자네들 둘 다 잘 듣게나. 내가 동경대의 객원 교수로 가 있던 45세 때의 일이었네. 다시 말해, 1970년도의 일이었지. 나는 27년 전인 1943년도의 일을 때때로 떠올리면서 말일세. 일본인 제자들에게도 유선(流仙)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었네. 동경대학생들까지도 나의 강의엔 뭔가 인간의 향기가 넘쳐흐른다며 수강을 하겠다고 많이들 몰려들었었네. 하지만, 나의 내면으로는 말일세. 월선녀와 헤어져 떠나온 터라, 너무나도 가슴이 공허하고도 외로운 날들이었지. 그리하여, 때때로 유선문에 입문할 당시를 회상하며 나의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네."
성찬이 유선문에 입문한 시기는 일제 치하인 1943년의 봄이었다. 그 당시의 성찬은 동경대로 유학을 간 신입생 시절이었었다. 청소년기부터 무술 서적들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탐독하여 견문을 넓혀 온 성찬이었다. 눈을 씻고 보더라도 희망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한 시기였었다. 시대적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가슴이 괴롭고 허전한 터였다. 일인(日人)들에 의하여 수탈과 핍박을 당하던 상황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때였다. 게다가 악질적인 일인 폭력배들이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선량한 조선인들을 수시로 괴롭히곤 했었다. 뭐가 불만이었든지 일인 부랑배들의 눈엔 하나같이 붉은 빛이 충만하여, 살기가 넘쳐흘렀다. 저자 거리로 나섰다가 이유도 없이 몰매를 맞고, 보퉁이를 빼앗긴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 도일(渡日) 직전 무렵부터는 부쩍 설움에 북받쳐 울부짖는 농부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암담한 현실에서 굳이 공부를 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겠는가를 재고도 해 보았다. 몰락한 가문의 회복도 해야겠고, 암담한 현실의 극복도 해야만 했다. 극도의 번민과 방황으로 몸살을 앓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책과 싸웠다. 책에 수록된 수많은 활자들이 순탄한 삶을 가로막는 난관들로 여겨지기도 했다. 책과 현실의 숨 가쁜 대립 장면들 속에서도 성찬의 마음은 마구 뒤흔들려 고통이 컸다. 가까스로 번민과 갈등을 이겨내고서,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간 터였다. 마을이 떠나갈 듯한 환호와 격려를 받으며, 마침내 현해탄을 건너게 된 거였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와 격려는 식민 치하에서의 대리 만족과도 같은 정서였을 터였다.
한없이 꿈에 부풀던 동경대의 신입생 시절이었다. 사월 초순이라 산야의 곳곳에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지천으로 흩날리던 때였다. 오사카의 북동쪽 교외에는 조선인 집단 촌락인 진고꾸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학생 친구인 준혁과 함께 성찬은 조선인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진고꾸에 찾아들었다. 마을 앞엔 커다란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시내의 곳곳에는 갈숲이 파랗게 어우러져 있었다. 시냇가에 일렬로 세워진 바지랑대에서는 널어놓은 빨래들이 미풍을 맞아 한가로이 나부끼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얕은 야산이요, 남으로는 널따랗게 펼쳐진 평야 지대가 드리워져 있었다.
오후 3시 무렵의 시각이라, 들녘을 적시는 바람결이 갈숲에 부드럽게 휘감기고 있었다. 마을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인 나머지, 한결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내풍겼다. 헌데, 바로 이 때였다. 한 대의 낯선 승합차가 먼지를 날리며, 마을 입구에 와 닿았다. 승합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떼 지어 마구 마을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곧바로 쿵쾅거리면서 내달아, 집기물을 박살내면서 동네 주민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에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머리통이 깨져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사람들. 달아나다가 몽둥이에 넓적다리를 맞아 고꾸라지는 사람들.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마구 비명을 질러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독학으로 기본적인 무예의 기초를 갖춘 성찬이었지만, 우선 부랑자들의 맹위에 기가 질렸다. 그리고, 영문도 모르는 일에 무턱대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복장이나 주고받는 말소리를 들어보건대, 마을 주민들은 틀림없는 조선인들이었다. 또한 습격을 해 온 일련의 무리들은 일본 폭력단원들인 닌자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습격해 온 이유가 뭔지, 왜 그들이 광란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성찬은 일단 행동을 삼가기로 했다. 영문도 모를 일에 휩쓸려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준혁과 함께 마을 건너편의 강둑에 숨어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지켜보았다. 점차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마을의 집들이 화염에 휘감기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강도나 보복이 아닌, 아예 근원을 없애 버리겠다는 결기마저 엿보이는 일이었다. 불길을 피해 연방 비명을 질러대며 조선인들이 이리저리로 내몰리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닌자들은 머리에 하나같이 수건을 질끈 동여맨 채, 날렵한 동작으로 무기를 휘둘러 댔다. 무기가 사선을 그을 때마다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죽어 넘어졌다. 승합차가 도착한 지 채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성찬과 준혁은 혹시라도 닌자들에게 발각되어 해를 입을까 봐, 이제는 전신이 다 떨렸다. 어쨌든 말이다. 죄 없는 부녀자들까지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장면은 치가 떨리는 지옥도였다. 혹시라도 이러한 위난을 구해 줄 만한 기적은 없을까하고 마음을 졸이며 생각에 잠겼다. 너무나 끔찍스런 나머지 성찬은 고개를 숙인 채 강둑의 억새풀을 쥐어뜯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준혁이 놀란 듯한 목소리로 나의 귓속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 봐, 성찬아! 잠깐 저길 좀 봐!"
성찬도 놀란 마음으로 건너편의 마을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농부가 닌자들과 대치하여 우뚝 서 있었다. 한복 차림새로 우뚝 선 농부의 손에는 각목이 하나 쥐어져 있을 뿐. 농부 주변으로는 이십여 명의 닌자들이 빙 둘러서서 일촉즉발의 상태였었다. 마을 사람들 중의 어느 누구도 농부를 돕기 위해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찬과 준혁의 가슴에도 온통 불안감과 황송함이 잔뜩 밀려들고 있었다. 황송함이란 농부의 위기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돕지도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함이었다. 극도의 불안감과 안타까움에 젖어 있을 때, 귓전을 파고든 것은 우렁찬 기합 소리였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 같으니라구. 대낮에 이렇게 겁 없이 사람들을 죽여? 오늘 날짜로 너희들의 목숨은 내가 거두어 가마. 이야아앗!!"
뒷산을 뒤흔들며 메아리쳐 오는 농부의 기합 소리는 가히 청천벽력에 가까운 위세였었다. 기합 소리가 막 끝나는 듯싶자, 농부의 각목이 종횡무진으로 허공을 갈랐다. 닌자들과의 날카로운 접전이 일어났다. 장검과 단도를 빼어든 닌자들과 각목을 든 농부와의 겨룸이 벌어진 거였다. 각목이 뻗쳐오를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사방으로 튀면서 닌자들이 차례차례로 나뒹굴었다. 5분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땅 바닥에는 승합차에서 내렸던 이십여 명의 닌자들이 새카맣게 나뒹굴어져 있었다. 쓰러진 형상을 바라보자니,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한 마디로, 모두들 각목을 맞아 절명한 터였다.
"그 때의 농부가 나의 사부님이셨던, 유선문 제10대 문주님이셨던 남용하(南龍河) 어른이셨네. 마을의 유혈 사태가 있던 날부터 집요하게 매달려, 마침내 내가 제자로 지목되었다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 분의 무예야말로 가히 신화적인 경지였었네. 아무렴 그렇고 말고."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과거사를 들려주더니만, 돌연 눈을 번쩍 떴다. 그러면서, 형형한 눈빛을 실어, 여인과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전무후무한 조선 최상의 검법인 무상검법(無上劍法)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네."
노인은 1cm 두께의 다섯 장의 석판에 새겨진 선형 괘도를 보면서 숨길을 가다듬었다.
"본디 이 검법은 정유재란을 끝으로 왜군들이 조선을 떠날 무렵에 출현되었었네. 이 검법의 저술가는 본국검의 달인이었는데, 신분상의 위협으로 성명을 밝
히지 않았었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선조 때의 명장인 이청환(李晴煥)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지. 나도 그 분 이외에는 그처럼 심오한 검법을 구사할 만한 인재는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거든. 아무튼 이청환은 본국검의 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세적인 병법가이기도 했었지. 어느 정도냐 하면, 은퇴하려는 그를 선조가 간곡히 만류할 정도로 대단한 무인이셨다네. 본래에 이 석판 위에는 먹으로 새겨진 글자가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먹은 지워져서, 지금은 새겨진 선밖에는 볼 수가 없다네. 내가 이러한 경위를 알게 된 것은 쌍발의 퇴적암층에서 발견된 이 서책들 때문이네. 아마도 누군가 이러한 서책들을 안고 수련하다가 퇴적암층에 숨겨둔 것 같았어. 이들 몇 권의 서책에 놀랍게도 새로운 역사의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었어. 당분간 나는 이 서책들을 개인적으로 보관했다가, 나중에는 문화재 관리국으로 넘겨줄 작정이네. 이제 동굴 안은 땅거미가 짙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의 지시에 따라, 호롱불을 켜서 동굴 안을 밝혔다. 노인은 은빛의 머리카락과 흰 색의 수염을 살짝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원래 이청환은 선조조에 조정을 물러나면서, 시샘에 의한 정적 제거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청환은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검법의 연구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초야에 묻힌 지 10년 세월이 지나면서, 이청환은 마침내 절세적인 무예인 무상검법을 완성시켰다. 원래 검법이란 정에서 동으로, 동에서 정으로 변화무쌍한 동작의 총화였다. 또한 검의 운용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제압하는 생명 보존의 무학이기도 했다. 하지만, 검술의 단련에는 지극히 심오한 또 다른 본질적인 면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검의 운용을 통한 체내의 기력 순환에 의한 건강 증진이었다. 기(氣)란 전자기 에너지의 일종이라고 했다. 또한 기의 흐름은 세포 내 물질을 통한 전자들의 이동 현상과 직결되는 터였다. 한편 전자란 금속의 무딘 면보다는 뾰족한 면을 통하여 이동이 잘 되는 거였다. 게다가 검이란 철을 주금속으로 하여, 니켈과 크롬 등이 첨가된 금속 제품이 아닌가! 검의 자루도 더러 철제로 만들어지기에, 검 자체가 좋은 전기의 도체일 터였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기의 수련에 있어서는 검을 이용한 동작들이 적지 않았다. 기의 원활한 소통과 흐름을 위하여, 검이 사용된 경우는 조선 시대가 절정기였었다. 이러한 기공 검법의 절세적인 달인들 중의 하나가 이청환이었다. 예로부터 기의 수련은 장생불로를 지향하는 선조들의 필수 수련 과정이었었다. 검법들 중에서도 이러한 기의 수련에 역점을 둔 검법을 상승검법이라고 불렀었다. 상승검법은 전투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공격 무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보다 원활한 기의 흐름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건강 증진의 절대적인 비술인 셈이었다. 이청환은 비록 과학적인 이론 기반은 몰랐을지라도, 무상검법의 창안을 통한 기공 검술의 달인이었다. 성찬이 검법과 기의 수련에 보다 깊이 매료된 것은 유선문에 입문하면서부터였다.
훌쩍 일본으로 가 있던 남용하를 만나면서부터 성찬은 새로운 세계와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 스승인 남용하는 견디기 어려운 생활고 때문에 도일한 상태였었다. 닌자들을 처치해 버린 남용하는 바로 마을을 떠나 도피 생활을 나섰다. 험난한 도피 생활 중에서도 남용하는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혼신의 열의를 다했다. 남용하는 벽촌의 골짜기 골짜기를 떠돌다가 해방이 되면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성찬은 동경대 재학 시절 동안에, 부지런히 유선도를 수련했다.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문주(門主)로서의 손색이 없는 무술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 거였다. 유선도는 크게 3가지의 무예로 이루어져 있었다. 권법과 검법에 이어, 거문고를 이용한 탄주법이 있었다. 권법은 기공의 수련이 없이도 가능한 외공에 속하는 무예였다. 하지만, 유선도의 권법은 워낙 정치(精緻)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히 독보적인 무학이었다. 한 마디로 권법만으로도 다른 어느 무술에도 뒤지지 않는 탁월함을 지니고 있었다. 검법과 거문고의 탄주법은 기공의 연마를 통해서만 수련이 가능한 내공의 무예였다. 성찬의 무술의 수련은 남들과의 싸움질보다는 건강 증진면에 본질적으로 치중하고 있었다. 성찬에게는 유선도가 중국의 태극권처럼 전국민의 건강 체조술로서 보급되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유선문의 무학이란 워낙 수준이 높아, 아무나 흉내낼 수는 없는 터였다. 다섯 장의 석판에 새겨진 곡선의 궤적은 확실히 무상권법의 절묘한 운용 동작들이었다. 노인은 동굴 내의 보자기를 풀더니, 은빛으로 눈부신 장검을 뽑아 들었다. 여인과 나를 구석으로 보내어 놓고는 동굴 중앙에서 눈을 감은 채 우뚝 섰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복잡한 궤적들에 불과한 것들의 의미를 금세 간파한 모양이었다. 얼굴에는 일체의 사념들이 제거되어 하나의 석상과도 다름 없어 보였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칼이 빛을 뿜어내며 왼쪽 가슴 상반부로부터 우측 하반부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면서, '휘익 휙'하는 검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토해 내었다. 점차 칼 놀림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고, 사람과 칼이 완전히 어우러진 상태였다. 일상적인 검도관에서 검도인들이 휘둘러 대던 동작과는 확연히 달랐다. 단순한 손목에 의한 힘이 아닌, 전신의 기력이 한 자루의 칼에 집중되고 있었다. 칼바람이 토해 내는 공기의 파장이 '팍팍' 소리를 내며 연방 귓전에 와 닿았다. 결코 간단한 칼날만의 동작은 아니었다. 검과 사람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일시에 눈부신 검광을 뿜어내기도 했다. 확실히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절묘한 동작들이었다. 여인과 나는 기가 질린 채, 넋을 잃고는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족히 30여 분은 흘렀으리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지울 생각도 없이 노인은 학 다리의 자세로 우뚝 섰다. 얼굴색은 잘 익은 복숭아 빛처럼 홍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숨을 내쉬는 헐떡거림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의 운동량이면 숨결이 헐떡거릴 만도 했건만, 전혀 그게 아니었다. 나와 여인은 일시에 깨달은 바가 있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떡거리며 감탄했다. 소위 내공과 외공과의 차이점이 이런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터였다. 여전히 노인은 학 다리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인에게 양초 하나를 준비하여 불을 켜도록 지시했다. 금세 양촛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노인은 잠자코 칼끝을 촛불을 향해 겨누었다. 칼끝과 촛불의 거리는 대략 5 m쯤 되었으리라. 부동자세로 선 채, 기합 소리를 짧게 내뱉는 순간이었다. 밝게 빛을 뿜어내던 촛불이 대번에 꺼져 버리고, 흰 연기만이 피어올랐다. 헌데, 촛불이 꺼지기 전이나 후에 있어서, 노인의 검날의 위치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부동의 자세로 검날이 촛불을 향한 채, 체내의 기가 검을 통하여 전달된 거였다. 그리하여, 기파(氣波)를 맞아, 촛불이 맥없이 꺼져 버리고 만 거였다. 여인과 나는 그저 놀라운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기파의 위력을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전에도 문화방송의 기인열전의 프로를 통해, 기의 달인들의 시범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목전에서 기의 시연 장면을 보게 되다니, 그저 가슴이 벅찰 따름이었다. 이윽고, 노인은 검을 동굴 바닥에 내려놓고는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들 둘은 내일 아침부터 샛강으로 나가서, 유선도를 전수받도록 하게나. 대략 3개월간의 시간이 걸릴 걸세. 그 이후에는 자네들이 틈이 날 때면 언제든지 쉬임 없이 수련을 해야만 하네. 대략 2년 정도를 수련한다면, 가히 무적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확신하네. 그만큼 유선도의 무학은 절세 무적의 경지일세. 국내외의 어느 무술일지라도 감히 유선도와 맞겨룰 무술은 없다고 생각되네. 한 마디로 유선도는 고금의 무술 절학의 총화라고 할 수 있네. 믿기지 않겠지만, 수련한 후에는 유선도의 위력을 스스로 느끼리라고 확신하네."
노인은 잠시 호롱불을 흘낏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일세. 거문고의 악곡인 해동비음(海東秘音)은 나의 친구인 월선녀가 직접 지도를 해 줄걸세. 나 역시 거문고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왕이면 전문가를 초청하여 자네들을 지도하고 싶다네. 내일 아침부터는 지난번의 입문식이 있었던 샛강 알지? 거기에서 무술과 기공의 지도를 해 주기로 하겠네. 이제 밤이 꽤 깊었으니 이만 자기로 하자꾸나.
동굴 입구에는 제법 수량이 넉넉한 옹달샘이 있었다. 옹달샘에서 넘쳐흐르는 물줄기는 절벽을 적시며 아래로 졸졸 흘러 내렸다. 동굴 바닥을 깨끗이 닦고는 자리 배열을 하기로 했다. 동굴 중앙에는 철사줄을 쳐서, 미리 장만한 커튼으로 동굴을 두 구역으로 나누었다. 동굴 가장자리에도 커튼을 두르니, 동굴은 한결 내부가 우아해진 아담한 보금자리로 변하였다. 내실은 여인의 숙소로 삼고, 외실은 노인과 나의 숙소를 삼기로 했다. 8월 중순이라, 바깥은 열기로 잠들기 어려웠지만, 동굴 내부는 시원한 것이 잠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동굴 내부에 서식할지도 모르는 지네 등의 독충을 제거하기 위하여, 분사제를 사방으로 내뿜었다. 분사제의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를 기다린 다음에, 일제히 잠자리에 들었다. 고단했던 탓이었으리라. 잠자리에 들자마자 모두들 순식간에 잠의 수렁으로 빠져 든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샛강에 닿아 목욕을 마치고 나니, 아침 8시 무렵이었다. 등짝에 유선도(流仙道)라고 새겨진 남색 도복으로 차려 입고는 셋은 일제히 무술 동작을 시연했다. 노인이 하나의 동작을 시연하면, 여인과 나는 노인의 동작을 고스란히 흉내 내었다. 그토록 가슴 속에서 들끓던 잡념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오로지 무술만이 전부였다. 노인은 한 동작이라도 허술하게 넘어 가지를 않았다. 조금이라도 틀린 곳이 있으면, 제대로 될 때까지 자세를 세세히교정해 주곤 했다. 같은 지적을 두 번 이상 받지 않으려고, 여인과 나는 사력을 다해 노력했다.
"어허, 손가락을 꼿꼿이 세우랬잖아? 쯧쯧쯧! 그냥 허수아비처럼 들고만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란 말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적도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구. 그렇지, 바로 지금 취한 바로 그 동작 말이라구, 알았어?"
노인은 지칠 줄 모르게 두 시간을 내리 지도하고는 허리를 펴더니, 하늘을 우러렀다. 그러다가, 여인과 나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자네들은 계속 여기에 남아서, 착실히 반복 수련을 해야 하네. 그러다가, 점심 무렵이 되거든 목욕을 하고 동굴로 돌아와 주게나. 그럼, 이만 먼저 가겠네."
노인은 말을 마친 뒤에, 강에서 목욕을 끝내고는 먼저 동굴로 돌아갔다. 여인과 나는 유선도의 권법(拳法) 도식인 잠룡승천(潛龍昇天)의 부분 동작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잠룡승천의 무예는 모두 36개의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작들마다 운동량이 상당히 컸기에, 얼마 경과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복 차림의 여인의 모습을 흘낏 바라보았다. 수려한 미모에 도복까지 차려 입은 단아한 자태를 보노라니, 온통 가슴이 떨려 왔다. 어쩜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싶은 느낌이었다. 여인의 미색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다시 무예의 동작에 골몰했다. 나는 이내 전신이 땀으로 젖어 들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반복 수련을 계속했다. 여인도 내게 뒤질세라, 이를 악물고 고된 수련을 계속했다. 나의 눈에 비친 여인의 동작은 아무래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나로 말하면 십여 년의 세월 동안을 태권도로 수련해 온 무술인이었다. 반면에, 여인은 전혀 무술의 기초가 잡혀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동작은 유연하고도 정확했다. 게다가 동작에 약간의 힘만 실린다면, 대단히 위력적일 게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여인에 대한 관심을 떨쳐 버리고,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룡승천이라! 물 속에 잠겨 있던 용이 하늘로 날아오름을 말함이었다. 나는 마치 용이 된 듯한 기분으로 잔뜩 기개를 보이며 연습에 몰두했다. 540도 각도의 회전 발차기 동작에 있어서, 정확성이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항이었다. 기본 골격을 터득하는 데에도, 아무래도 3개월은 족히 걸릴 지경이었다. 정말 산다는 게 무엇인지 때때로 돌이켜 보아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잠룡승천을 연습할 무렵에,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엇을 할까하고 문득 생각해 보았다.
생각을 하자니까, 새삼 이 세상 사람들의 입김과 체온이 그리워지는 느낌이었다. 비록 지금의 나는 감정의 열기(熱氣)를 조절하지 못하여, 노인을 찾아온 신세이지만 말이다. 주위에 시련이 있고, 시련을 극복하고자 애썼을 때가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의 정체마저 알 수가 없어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해양과학 중에서도 해양 에너지에 대한 연구를 한창 진행하고 있어야 할 때인데도 말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나는 때때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불시에 끓어오르는 잡념으로 인하여 더러 쩔쩔거리곤 했다. 일단은 심성 수련을 해야만 했다.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면 말이다. 사실상으로 살아도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는 터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나는 나의 무술을 화풀이용으로 휘둘러 온 적이 적지 않았음을 자인한다. 항시 그 때마다 그럴 듯한 핑계와 명분을 세웠지만 말이다. 언제나 가슴 한편으론 석연찮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 가슴의 밑동을 적시곤 했었다. 그리하여, 내가 폭력을 휘두른 날이면 나는 언제나 울먹이는 심정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었다. 보이지 않는 가슴속의 무엇인가가 늘 나의 의식을 옭아매려고 했었다. 내가 억눌린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늘 나의 주위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처음에는 우연이려니 여겼던 일들이 나중에는 놀랍게도 앞뒤로 아귀가 맞아 떨어지곤 했었다.
"아니, 사형! 연습을 하다 말고 뭐하세요? 곁에서 보니, 완전히 넋을 잃은 사람 같단 말이에요. 혹시 근심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오호, 그랬었나? 내가 잠시 과거사를 떠올렸던 모양이군? 깨우쳐 주어서 고마워, 사제!"
여인은 가지런한 치아를 살짝 드러내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사부님이 동굴로 가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어요. 어서 씻고 돌아가야죠?"
말을 끝내면서 여인은 강의 상류 지점으로 목욕을 하러 떠났다. 나는 하류의 갈대 숲 부근에서 옷을 벗고는 몸을 물에 담갔다. 한없이 맑은 강물에 몸을 담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의 근심이 다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물에서 푹 자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잠시 후에 여인과 함께 샛강을 떠나, 동굴로 향했다.
샛강은 50여 미터의 폭을 이루고 있었고, 샛강의 양쪽에는 높다란 산악이 펼쳐져 있었다. 샛강은 계속 흘러 상족암의 해변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갈대숲이 넓게 펼쳐진 샛강의 중류 부근이 유선문의 수련 장소였다. 샛강의 양안을 따라, 기다란 강변길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강변길을 따라, 동굴까지의 길은 대략 1 km에 달하는 거리였다. 강변길에서 동굴을 향해 걷노라면, 500 m쯤의 거리에, 낡은 오두막집이 한 채 있었다. 오두막집은 구조물 자체로는 멀쩡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였다. 아마도 주인은 도회로 떠나 버리고, 집만 달랑 남겨진 모양이었다. 나는 여인과 함께 동굴로 가던 도중에, 잠시 폐가를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내가 집을 한 번 보고 싶다니까, 여인도 함께 들여다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대문 없는 오두막집에 들어서고 보니, 곳곳에는 온통 거미줄 투성이였다. 지붕은 낡은 슬레이트로 덮여 있었으며, 대청마루엔 집기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닫힌 방문을 열어 보았더니, 방바닥에는 장판이 깔려 있어, 제법 쓸 만했다. 적어도 비가 내릴 때나 겨울철에는 추위를 피할 정도는 되었다. 방은 단 한 개였고, 벽은 어디에도 갈라지거나 구멍이 뚫린 곳은 없었다. 내가 벽이며 방의 구조를 살피는 동안에 여인은 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여인은 마당에 서서 파랗게 펼쳐진 강물을 바라보며 뒷짐을 쥐고 있었다. 높다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망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때는 점심나절이라, 하늘빛은 유난히 푸르렀고, 수면에 와 닿는 햇살은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집을 나와 채 몇 발짝을 걷기도 전이었다. 강의 상류로부터 갑자기 거룻배 한 척이 유유히 나타나더니, 오두막집이 있는 강변으로 다가왔다. 거룻배 위에는 40대 중반의 중년 여인과 20대 초반의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두 여인은 부지런히 노를 젓더니, 배를 곧장 강가에 대었다. 배에서 내린 두 여인은 곧장 오두막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여인은 모두 연두색의 얇은 개량 한복 차림새였다. 두 여인은 곧장 강 언덕을 걸어 올라와 여인과 나를 지나쳐 갔다. 그러더니, 오두막집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거였다. 여인과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여인은 마치 집 주인이라도 되는 듯, 보자기를 꺼내 활짝 펼쳤다. 여인과 나의 거동을 수상히 여겼든지 중년 여인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이봐요, 청년! 잠시 나 좀 봅시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발길이 자연스레 중년 여인을 향했다. 오두막집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중년 여인과 처녀가 나란히 서서 여인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두색의 얇은 개량 한복 차림의 중년 여인은 합죽선을 펼쳐 든 자세로 다가왔다. 중키에 늘씬한 골격을 갖춘 중년 여인이었다. 드물게 보는 미모의 얼굴은 매우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겨,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이었다. 나는 중년 여인의 앞에 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제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
"그래요. 잠시 뭐 좀 물어 볼 일이 있소. 이리 와서, 차 한 잔을 들면서 이야기나 좀 합시다."
중년 여인은 샛강의 발원지인 향로봉(해발 고도 578.5 m)의 와룡리 계곡에서 처녀와 숙식을 함께 한다고 했다. 중년 여인의 이름은 매선화(梅仙花)였고, 처녀의 이름은 심은정(沈恩情)이라 했다. 선화는 약대 출신으로서 약초 연구에 심취해 있는 45세의 독신녀였다. 일찍이 결혼을 약속한 사내가 있었지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나 버린 터였다. 한 번 쓰라린 경험을 당한 선화는 그 이후로는 차라리 독신으로 지내고자 했다. 선화는 제약회사에서 약초를 연구하다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뛰어든 은정을 만나게 된 거였다. 근래에 들어서 선화는 은정과 함께 때때로 여행을 나서곤 했다. 그러다가, 향로봉 운흥사의 팔순의 고승인 청강(淸江)을 만나, 와룡리 계곡에서 체류해 왔다. 청강은 절 뒷산에서 죽염을 굽기도 하고, 작설차를 재배하기도 했다. 청강은 정성을 들여 작설차를 끓이기를 좋아했다. 손님들이 오면 언제나 작설차를 끓여 대화를 즐겼다. 세월이 가져다 준 지혜에 덧붙여, 청강은 대금을 부는 데에 있어서도 명성이 높았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면서도, 스스로 개척한 경지가 실로 보통이 아니었다. 풍문으로 명성을 전해들은 국악원의 대금 연주의 달인들까지도 방문을 하고는 감탄을 할 정도였다. 청강이 작곡한 대금곡(大琴曲)만도 600여 곡에 이르고 있었다. 청강은 산인(山人)으로 자처하며, 향로봉의 정취와 더불어 세상을 사는, 인품이 실로 고매한 고승이었다. 선화와 은정은 와룡리 계곡에 임시로 움막을 짓고는 숙식을 함께 했다. 틈나는 대로 청강으로부터 지도를 받기 위해 운흥사의 객사전을 찾고는 했다. 대금의 지도를 받은 뒤엔 작설차를 마시며, 세상사를 입에 담으며 대화를 즐기곤 했다. 주로 주말을 이용하여 지도를 받곤 하여, 어느새 두 달째에 접어든 거였다.
2주 전의 밤이었다고 한다. 청강은 두 여인을 불러, 샛강에 뱃놀이를 가자고 제안했었다. 두 여인은 일시에 놀랐지만, 부쩍 호기심이 일어 샛강에 배를 띄웠다. 청강은 배 젓는 요령을 지도해 주었고, 두 여인은 쉽게 배를 젓게 되었다. 샛강의 상류에서부터 출발하여, 폐가가 된 오두막집이 있는 중류까지 배를 몰곤 했다. 그 날 이후로, 두 여인은 곧잘 샛강에 배를 띄우곤 했다. 주로 밤 시간에 배를 띄웠기에, 여인과 나의 눈엔 띄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은 한낮의 풍광을 감상하자며, 선화가 배를 띄웠기에 여기에서 마주치게 된 거였다. 선화는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배를 저어 내려오던 중에 한참 동안을 체류했노라고 말했다. 사유인즉슨, 노인을 위시한 여인과 나의 무술 수련 장면을 보게 된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무술 영화를 촬영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켜본 바로는 그것도 아니어서, 잔뜩 호기심이 끓어올랐다고 했다. 눈에 띄지 않게 갈대숲에다가 거룻배를 숨기고는 은밀하게 여인과 나를 지켜본 거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여인과 나는 온통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술 수련이 끝나면, 여인은 상류에서 나는 하류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인과 나를 부부 사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목욕을 하고 올라설 때까지의 행동을 지켜본 바로는 그게 아니었다는 거였다. 그랬기에, 더욱 놀라운 마음으로 대관절 어떻게 된 내력인가를 알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곧장 배를 몰아 온 거였고, 급기야 나를 부른 거라고 했다. 나는 유선문의 입문 경위와 수련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여, 일단 성의를 보였다. 그런 뒤에, 두 여인에게 대금 연주를 정중히 부탁했다. 두 여인은 찻잔을 마저 비운 뒤에, 흔쾌히 대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악곡은 너무나 잘 알려진 유초신지곡 중의 상영산이었다. 이 곡은 언제 들어도 사람의 심혼(心魂)을 뒤흔드는 악곡이었다. 다음으로는 청강의 작곡인 월하매향(月下梅香)이라는 악곡이었다. 15분의 연주 시간 동안에, 여인과 나는 넋을 잃은 채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 어쩌면 선율이 이렇게까지 황홀하게 휘감길 수 있을까 싶었다. 선율의 강약과 고저가 너무나 섬세하여 바람에 흩날리는 물결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악곡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여인의 눈에는 맑은 눈물 방울이 매달려 떨고 있었다. 여인의 섬세한 정서를 보는 순간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감동을 느꼈다. 대관절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뭐란 말인가? 아, 나는 또 다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부단히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번에는 두 여인이 여인과 나에게 잠룡승천의 무예 시범을 부탁했다. 여인과 나는 즉시에 폐가의 뜨락에 서서, 잠룡승천의 36가지의 동작을 펼쳐 보였다. 첫 날의 수련인데도 동작은 정화되어 한없는 기품을 내뿜고 있었다. 공중 이 연속 뒤돌려 차기와 수직으로 솟구쳐 발꿈치로 내리찍는 동작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켜보던 두 여인이 일제히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질러댔다. 동작을 모두 끝내고는 넷이 나란히 평상에 앉아, 작설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쩐지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친숙한 느낌이었다. 살아가면서, 금전이나 물질만으로는 누릴 수 없는 소중한 정신적인 교감(交感)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선화와 은정은 여인과 나에게 언제든지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며 명함을 건넸다.
두 여인과 헤어져 동굴로 돌아오니, 노인은 점심상을 차려 놓았다. 여인과 나는 미안한 마음에서 얼굴을 붉히며 일제히 말했다.
"아이, 사부님께서 점심상을 차리시다뇨? 저희들은 부끄러워서 숨을 곳이 없다구요. 이런 일은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할게요. 조금 늦게 와서 미안해요."
노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1시간 동안을 심성 수련에 몰두했다. 셋이 모두 동굴 벽을 향해 앉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잡념을 불식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만 들리는 것은 절벽에 매달리듯이 돌출한 다복솔에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였을 뿐. 일체의 세속의 잡념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수시로 분노로 들끓곤 하던 나의 마음이 점차로 평온해지고 있었다.
심성 수련이 끝난 뒤엔 또 다시 샛강으로 건너가, 무술 수련에 골몰했다. 저녁 6시 무렵까지 수련한 후에는 다시 동굴로 되돌아가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한 시간 동안을 심성 수련에 몰두했다. 그리고 나서는, 두 시간 동안을 기초 체력 운동으로, 전신의 근육을 단련시켰다. 그런 뒤에, 옹달샘에서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는 밤 9시 무렵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새 2개월이 흐른 9월 하순이었다. 온 산과 들녘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들녘에는 억새풀들이 지천으로 내리깔려, 불어오는 바람결에 갈기를 세우며 길길이 남실거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었다. 노인은 여인을 불러, 한 사람 분의 밥을 더 준비하라고 일렀다. 변산의 월선녀가 저녁 무렵이면 동굴에 도착한다는 거였다. 나는 이미 월선녀가 동굴을 방문하리라는 것을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월선녀의 방문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나는 노인과 월선녀의 노후의 결합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선문의 무술 중의 해동비음(海東秘音)의 전수를 위한 전문가의 초청이었다. 어쨌든 나에겐 월선녀의 존재가 신비스럽게 느껴졌었다. 이전에 노인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순간부터 월선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었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이 되자, 마중을 나가겠다고 자청을 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떡거리며, 월선녀의 인상착의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정확히 오후 5시 45분에 전주발 사천행 버스가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가 멈춰 서자마자 손님들이 차례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노파의 인상착의를 떠올리며, 70세 가량의 월선녀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승객들이 거의 다 내릴 무렵이었다. 거문고로 보이는 기다란 보퉁이를 들고 천천히 내려서는 백발의 노파가 있었다. 나는 물어 볼 것도 없이 월선녀라고 단정을 내리곤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노파의 눈매는 쌀쌀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치 너 언제 나를 봤느냐는 듯한 냉혹한 눈초리였다. 나는 다소 주눅이 든 기분으로, 상냥하게 말을 건네었다.
"혹시 변산에서 오신 월선녀 선생님이 아니세요? 저는 ……"
"사람 잘못 봤당께. 난 그런 사람 아녀. 길이나 좀 비껴 주구랴."
나는 참담한 심사에 휩싸인 채, 노파를 바라보며 뭔가 입을 다시 열려고 했다. 바로 이 때였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결이 좋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한 번 노인으로부터 들은 노파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여인은 월선녀의 인상착의는 아니었다. 이렇게 빼어난 미모와 절제되고 세련된 동작의 여인이 설마 월선녀일 리는 없으리라고 여겨졌다.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여인에게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려고 머뭇거릴 때였다.
"혹시, 안개노인의 제자 되는 사람인가요? 내가 바로 월선녀라우. 저기 화물칸에 가서 빨리 거문고를 찾아들고 오세요."
월선녀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진 거였다. 첫 눈에 보기로 나이보다는 월등히 젊어 보이는 노파였다. 원래는 백발이었는데, 고성의 상족암(床足岩)으로 오기 위해 염색을 했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얼굴이며 머리를 손질하고 보니까, 훨씬 젊게 보였던 터였다. 월선녀가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마중도 제대로 못할 뻔했었다. 나는 내심으로 당혹감을 느끼며, 거문고를 찾아들고는 월선녀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동굴에 닿으니, 저녁 6시 10분 무렵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띤 노인은 월선녀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여인은 그새 저녁밥을 맛있게 지어 놓고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에 닿는 순간에, 월선녀의 표정은 벅찬 감회로 이루 형언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월선녀와 노인을 위해, 여인과 나는 강변길을 거닐었다. 저녁 무렵이라 강의 수면에는 저녁 안개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은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강변길의 곳곳에 드리워진 미루나무들의 잎새들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파드득거리며 적막을 몰아내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강가에서 올라온 몇 마리의 개구리들이 풀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강물에는 상현달이 실타래처럼 풀려, 하늘거리면서 빛살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인은 몇 발자국을 거닐더니, 손을 내밀어 나의 왼쪽 팔짱을 끼려고 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슬그머니 팔을 하늘로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켰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여인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여인이 무안하지 않게 즉시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건넸다.
"사제! 우리가 수련을 한 지가 벌써 한 달이 됐지? 세월이 너무 빠른 것 같애. 줄곧 지켜보았지만, 사제의 운동 신경은 가히 천부적인 데가 있었어. 어쩜 그
렇게도 어려운 검술이라든지 권법을 모두 소화를 시키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야. 사제는 수련이 모두 끝나면, 역시 계속해서 도자기를 구울 거지?"
"당연히 그래야죠. 그것 말고는 다른 직업이 없잖아요. 근데, 사형! 내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솔직히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여인은 말을 하고 나서는 나의 얼굴을 그윽한 눈빛으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또 다시 급류에 휩쓸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인의 이러한 자세는 사랑을 고백하기 직전의 자세여서, 금세 가슴이 착잡해지려고 했다. 또 다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선옥과 지연의 아스라한 추억이 끓어오르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지르며, 비감(悲感)스런 표정이 되어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여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들어보아야 할 일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떡거려 동의를 표했다.
"사형! 그 동안 사형이 제게 너무나 잘 대해 주셨기에,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사부님의 지도보다는 사형의 지도를 더 많이 받은 몸이 아니겠어요? 사형!
내가 오늘의 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시름으로 보냈는 줄 아세요? 사형의 눈엔 제가 어떻게 보이나요? 그냥 단순한 여자로 보이세요 아님 사귈 만한 이성으로 보이세요? 저는 오늘밤에 꼭 대답을 듣고 싶어요. 대답해 주지 않을래요?"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여인은 빼어난 미모에 성품마저도 온화한 편이어서, 이성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선옥과 지연의 상념이 수시로 끓어올랐기에 말이다. 앞으로 다른 사람은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단순한 동물적인 욕구로만 친다면 말이다. 하루에도 두 차례씩은 샛강에서 여인의 알몸을 보게 되지 않는가! 여인의 나신을 볼 때마다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육욕이 치솟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때마다 심성 수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마음을 닦아 왔었다. 눈에 보이는 만상은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하면서까지 나는 욕망을 극복했었다. 하지만, 여인은 나의 나신을 바라보면서 이성으로 접근하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여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만약 내게 선옥과 지연의 일이 없었더라면, 내가 먼저 구애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가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하여, 하늘의 흰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여인은 나의 모습을 그윽한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가슴의 일각에서는 점차 감정의 회오리가 거칠게 용솟음쳐 올랐다. 나는 말없이 발부리의 돌을 걷어 차 강물로 날려보내었다. 금세 돌멩이는 허공을 날아 강물에 첨벙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나는 여인의 가슴에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되고, 거짓으로 대답을 해서도 안 되었다. 나는 한참을 골머리를 앓다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사제!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어서 고마워. 하지만, 우리의 중요한 일은 유선문의 제자로서 확고한 수련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돼. 사적인 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유선문의 미래를 위해 우리 열심히 노력하자꾸나. 내 말 알아듣겠지? 자, 걷던 길이나 계속 거닐자구."
밤이 되자, 월선녀는 여인과 함께 내실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반면에, 노인과 나는 동굴의 외실에서 함께 수면을 취했다. 다음 날부터 여인과 나는 월선녀로부터 해동비음이란 전무후무한 기공 연주법을 지도받게 되었다. 노인과 월선녀로부터는 언제나 신선 부부와도 같은 풍도(風度)가 넘쳐흘렀다. 잔잔한 대화에 이어, 수시로 활짝 웃음을 짓곤 하는 모습이 너무나 다정스러워 보였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벌써 동굴에 자리잡은 지 만 석 달째가 되었다. 10월의 하순인 월요일 아침이었다. 노인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여인과 나를 불렀다. 직감적으로 마침내 헤어질 날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아침이면, 맑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기도 하고 양치질을 하기도 했다. 점심나절이면 샛강으로 가서, 무술의 수련과 거문고의 연주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저녁나절이면 여인과 강변 길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었으며, 때때로 선화와 은정을 만나기도 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석 달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달아나 버린 느낌이었다. 노인의 표정도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애잔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마군과 백군! 자네들 둘은 명실상부한 유선문의 제12대 제자들임을 언제나 잊지 말아 주게. 지난 세월 동안 자네들의 무예는 이미 절대적인 경지에 올라섰네. 비록 천하무적이라고는 하기 힘들지라도 남들에게 쉽게 꺾이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하네. 무술과 더불어 심성의 수련도 놀랄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확신하네. 이제는 실력이 있다고 함부로 으스대지 않을 것이며,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거네. 유선도의 무예는 싸움이 위주가 아니라, 건강 증진이 기본 정신임을 언제나 잊지를 말게. 나는 월선녀와 함께 변산의 오두막집으로 떠날 테니까, 더러더러 찾아와 준다면 고맙겠네. 자, 이제는 서로 떠날 때가 된 것 같네. 부디 많은 사람들에게 유선(流仙)의 아름다운 풍도를 많이 보여 주길 바라네. 그리하여, 삭막한 세상에 보다 따스한 인간의 향기를 확산시켜 주기 바라네. 부디 잘들 가세나."
"사부님! 그 동안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구요, 유선의 도를 펴는 데 힘써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부님! 사부님과 함께 한 날들은 제게 영원한 추억이 될 거예요. 부디 건강하세요."
여인과 나는 노인과 월선녀를 향해 삼배(三拜)를 올린 후에, 일어나서 길을 재촉했다. 사천에서 진주까지 버스로 간 다음에 말이다. 진주역에서 수원역까지는 나란히 함께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유선문의 동문끼리의 회포를 기나긴 여행을 함께 하며 풀고 싶었던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