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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3회
           달그림자
                                                                                                                          손 정 모

                                                    3. 해동비음(海東秘音)

  인천의 해양과학 연구소에 닿자마자, 나는 곧바로 연구소장실에 들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4개월간의 휴직원을 제출해 놓고는 인천 시내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걸으면서 나는 당장 어디로 가야 할까를 생각했다. 이 때 문득 나의 뇌리에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인천을 떠나면 3개월 후에나 올라올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나의 일정 관계로 서둘기로 했다. 마음을 먹자마자 승용차를 몰아 곧장 경기도 양평의 호젓한 산 속에 접어들었다.

  팔월 중순이라, 오후 두 시 무렵의 햇살은 따가울 지경이었다. 맑은 산 공기에 휩싸여 청아한 수목의 향내가 스며들면서부터는 쇠락한 마음에 활기가 치솟아 올랐다. 차를 야산 근처의 길가에 세워 두고는 허위단심으로 산길을 올랐다. 야산이긴 하지만, 경사가 급한 산록이라 가능한 한 천천히 길을 타기로 했다. 산길을 오르자마자 상큼한 솔 향기가 후각을 간지럽히며 밀려들어왔다. 솔 향기에 걸맞게 고요한 산록을 스쳐 가는 솔바람 소리가 연신 귓전을 파고들었다. 때 맞춰 몇 마리의 박새들이 오리나무와 졸참나무를 넘나들며 맑은 음조로 지저귀고 있었다. 길섶에는 억새풀과 망개나무가 어우러졌고, 떨어진 솔잎이 쌓여 황금 빛깔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었다. 반시간을 걸어 오르자 능선길이 펼쳐지면서 산세는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10여분을 걸어서 마침내 부모님의 묘소에 닿았다. 나는 스포츠 가방을 꺼내, 소주 한 병과 과일을 묘석(墓石)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생시처럼 큰절을 올리며,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 소자 종철이가 찾아 왔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죠 ? "
  큰절을 올리고는 종이컵에 술을 따라, 봉분(封墳) 위로 뿌렸다. 칼로 과일을몇 조각으로 잘라서는, 봉분 주위로 골고루 던졌다. 그리고는 상의를 벗어 묘지 주변에 던져 놓고는 잠시 묘지에 드러누웠다. 하늘은 너무나 맑아 태고 시절의 순수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마음이 이를 데 없이 평온해지면서, 슬그머니 과거의 상념에 잠겨 들었다.

  내 고향인 양평 마을엔 나의 유년기 때부터 미루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산자락에 등을 기대고 자리잡은 집 뒤쪽으로는 줄줄이 소나무들이었던 반면에 말이다. 집의 울타리를 이룬 나무들은 대개 미루나무와 대추나무들이었다. 나에게 유년기의 추억이 있다면, 유년기의 가을에 떨어지던 버드나무 잎을 줍던 기억들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농사꾼이라, 수확물을 내다 팔기 위해선 읍내 시장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보통 해거름 녘이 되어, 어둑어둑해져야만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낮엔 개구쟁이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다지만, 핏빛으로 황혼이 질 녘이면 외로움에 떨곤 했다. 집집마다 밥 짓는 저녁 연기가 실안개처럼 피어오를 무렵이면 나는 외로움에 젖어들곤 했다. 벼를 벤 가을 벌판은 마냥 끝없이 널브러져 드러누워 있곤 했다. 저녁 연기가 낮게 내려 깔릴 무렵이면 말이다. 우뚝 치솟은 미루나무의 잎새가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광경이 이채롭게 느껴지곤 했다. 삼각형을 닮은 잎새가 노랗게 물들어 팔랑팔랑 뒤집혀지며 곡예를 부리다가는 마당으로 떨어져 내리곤 했다. 핑글핑글 사선을 그으며 내려오는 잎새로부터 반사되는 찬연한 색조들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이 세상을 떠받치는 가을이 그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새 동화 속의 왕자가 되어, 황금 보물을 주워 모으곤 했었다. 때로는 독특한 만족의 탄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어쩔 때는 시무룩해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노랗게 물든 버들잎과 함께 유년기의 가을을 보내곤 했었다. 그것도 잠시였고, 땅거미가 져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나는 금세 외로워지곤 했다.
  대청 마루에 걸터앉아, 부모님을 기다리다 지쳐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면 꿈결같이 부모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곤 했다.
  "얘, 종철아 ! 얼마나 배고팠니, 아가 ? "
  깨어나면 언제나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곤 했다. 그렇게 깨어나는 나의 모습을 아버지는 곁에서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고는 했었다. 그리하여, 유년기의 나의 나날은 떨어져 내리는 버들잎과 함께 저물어 가곤 했다. 나는 너무나도 순박하게 인생을 산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무덤가에 머물고 싶었다. 결국 한 시간 가량을 묘지에서 보낸 뒤에, 나는 산길을 내려왔다.

  곧장 차를 몰아 제부도 입구의 초소에 닿으니, 오후 5시 무렵이었다. 막 초소에서 문을 열었기에, 시멘트 포장도로 위를 따라 차량들이 진입하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승용차를 진입시켜 바닷물이 빠져나간 시멘트로 된 연육(連陸) 도로를 달렸다. 금세 제부도에 닿아 차를 해변 어귀에 세워 둔 채, 남쪽 해변으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물이 빠져나간 섬의 남단부의 끝자락엔 세 개의 바위섬이 펼쳐져 있었다.
  밀물 때엔 섬의 남단부와 500여 미터의 거리로 바다에 의해 단절되는 돌섬들이었다. 세 개의 돌섬 주변엔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사진을 찍느라고 북적대었다. 안개 노인의 심부름을 수행하려면 은밀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제일 커다란 바위가 매 바위였고, 가운데의 작은 바위가 제비 바위였다. 제비 바위의 상단엔 잡초와 다복솔 몇 그루만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정보 수집을 위해, 제비 바위의 상단을 장소를 바꿔 가며 촬영했다. 그리하여, 속성으로 사진을 뽑은 뒤에, 사진 분석부터 치밀하게 해 나갈 작정이었다. 필름 한 통을 소모한 뒤엔 차근차근히 제비 바위의 밑둥치부터 관찰해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세밀하게 관찰했어도 말이다. 바위 부근에선 이렇다 할 단서 하나를 찾지 못했다. 자꾸 서성거리다간 남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잠시 후엔 슬며시 해안을 따라 물러 나왔다.
  다시 모랫벌에 이르자, 차를 몰아 민박집을 물색했다. 일단 민박을 정하고 나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민박집에 묵으면서, 새벽녘에 제비 바위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커다랗게 인화된 36매의 제비 바위 사진을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분명 경계가 삼엄한 서해 지역이었다. 새벽 무렵에 자칫 잘못할 경우엔 말이다. 해상을 침투해 들어오는 무장 공비로 오인될 여지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상당히 골머리를 썩일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였던가 ? 잡다한 상념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사진 자료를 분석했다. 망원 렌즈까지 부착된 고성능 카메라였기에, 사진은 깔끔하게 나왔다. 헌데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뚜렷한 단서를 잡을 길은 없었다. 가능한 하나의 방법이라면 말이다. 섬의 꼭대기에 뒤덮인 다복솔의 언저리들을 삽으로 파 보는 길이었다. 왜 하필이면 제비 바위란 말인가 ? 슬그머니 짜증스럽기조차 했다. 스포츠 가방에서 야전삽을 꺼낸 다음에, 삽날을 점검하고는 곧바로 물 시간을 계산했다. 흰 복사지를 꺼내, 원을 그려 지구와 달의 궤적을 나타내었다. 흘낏 달력을 보니, 바로 음력 보름날이었다. 작도를 해 보니, 새벽 3시부터 썰물이 시작되어 오전 9시에 완료되는 거였다. 새벽 3시 무렵이라면, 보름달이 서쪽 하늘의 중반에 떠 있을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아침 6시가 되면 보름달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게 되는 터였다. 나는 해양과학 연구원이었고, 나의 작도는 정확하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 위해, 새벽 3시까지만 잠을 자기로 했다. 핸드폰에 내장된 경보 장치로, 새벽 3시를 맞추어 놓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대뜸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고는 숨을 죽였다. 다정한 음조의 촉촉이 젖은 여인의 목소리가 귓전에 밀려들고 있었다.
  "사형 ! 나예요, 은숙이 ! 사형의 일은 잘 되고 있나요 ? 저는 도자기 굽는 일을 어제 날짜로 동업자 친구한테 모두 인계해 놓았어요. 지금은 삼척 시내에서 22 km 떨어진 신기면 대이리의 환선굴(幻仙窟)로 달리는 중이에요. 다행히 환선굴 관리원들 중엔 제 여자 친구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 애한테 좀 도와 달라고 할 참이에요. 물론 그 친구는 믿을 만하죠. 어릴 때부터의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팬티 벗고 같이 지내던 처지거든요. 물론 우리의 일은 극비리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도 알기에, 너무 우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으음, 그리고 사형 ! 전화 받으시는 곳은 어디예요 ? 어머, 사형은 어느새 목적지에 닿으셨나 봐요. 사형의 일에도 행운이 따르기를 빌게요. 저도 잠시 후면 환선굴 앞의 매표소 부근에 닿게 돼요. 오늘밤은 매표소 언저리의 마을에서 천상 하룻밤을 보내어야 할 것 같네요."
  잠시 여인의 목소리가 떨리는가 싶더니, 한결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럴 때의 나의 마음은 지극히 당혹스럽기만 했다. 혹시 여인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여인은 한결 교태 어린, 비음 섞인 음색으로 말했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다소는 신비로움이 깔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형 ! 제 얘기를 듣고 있죠 ? 짙푸른 강물에 맑은 햇살이 남실대던 날 아침의, 유선문의 입문식(入門式)을 기억하시죠 ? 햇살이 그렇게 맑은 것은 처음 느끼는 일이었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 이성의 앞에 알몸으로 서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죠. 그 때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얼굴이 화끈거리고, 전신의 혈관이란 혈관은 다 터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헌데도 제게 비친 사형의 모습은 말이에요. 눈빛 하나 흔들림이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몸짓이었거든요. 그러한 사형의 모습을 보고서야, 저의 수양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여실히 느끼게 되었죠. 그 날의 매끄럽고도 탄탄해 보인 사형의 몸매는 가히 살아 있는 예술품으로 느껴졌어요. 뭐라구요 ? 농담이 지나치시다구요 ? 아니에요, 제가 왜 농담을 하겠어요 ? 솔직하게 느꼈던 저의 심정을 말하는 거라구요.
  또한 발가숭이 상태로 모닥불 앞에 나란히 섰던 우리들의 모습, 기억 나시죠 ? 지금까지도 정말 알 수 없는 건 말이에요. 낯선 남녀가 처음으로 발가벗은 채 나란히 섰는데도, 어쩜 그렇게 자연스러웠을까 하는 점이에요. 사형도 그렇게 느끼지 않으셨어요 ? 역시 사형도 마찬가지이셨군요 ? 저도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뭐라구요 ? 저의 몸매 역시 눈부실 정도로 탐스러웠다구요 ? 에이그, 망칙스러워라. 사형의 몸매도 아주 죽여 주던데요, 뭘 ? 호호, 농담이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어머, 저기 앞에 마침내 불빛이 보이네요. 잘 주무세요. 내일 또 연락 드릴게요, 안녕 ! "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다음,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신으로 여독(旅毒)이 밀려들면서 꿈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세상 모르게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붙이기만 하면 숙면을 취하는 것이 나의 잠버릇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기나긴 잠의 소용돌이에서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였다. 예리한 유리 파편처럼, 핸드폰의 경보음(警報音)이 절박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살그머니 민박집을 빠져 나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닷물이 밀려난 500여 미터를 달려, 금세 제비 바위 위에 올랐다. 오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산악 훈련으로 다져진 나였기에 거뜬히 해치웠다. 상부에는 정확히 7그루의 다복솔이 자라고 있었다. 달빛을 이용하여 다복솔 주위를 면밀히 훑어보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아무 곳이나 야전삽으로 푹푹 꽂으며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다른 소리가 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50여분간을 그렇게 공을 들였으나 소득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돌섬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다복솔을 붙잡고 막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밑둥치는 굵었지만 키가 작은 다복솔의 뿌리가 거의 뽑혀지려고 했다. 그리하여, 자세를 바로잡으며 다른 다복솔을 움켜쥐려고 할 때였다. 다복솔 밑에는 사각(四角)이 진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놀란 나머지,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인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끌어 올려보니, 청동 제품이었고 묵직한 느낌이었다. 혹시 지뢰나 폭약은 아닌가 싶어 면밀히 살폈으나, 다행히 그런 계통은 아니었다. 스포츠 가방에 A4 크기의 상자를 넣고는 가방을 섬의 밑둥치로 던져 내렸다. 그리고 나서는 조심스럽게 암벽을 타고 무사히 해변에 내려섰다.
  시계를 보니까, 정확히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막 돌섬을 내려서서 가방을 주워 들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나룻배 한 척이 소리도 없이 제비 바위 부근의 해변으로 와 닿고 있었다. 배 위에는 다섯 명의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사내들은 배가 해변에 닿자마자 민활하게 배에서 뛰어내리더니 곧장 나를 향해 몰려왔다. 나는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취하며 침착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의 색안경을 낀 사내가 말을 걸어 왔다.
  "이 봐 ! 당신이 흑골단(黑骨團)의 연락자요 ? 근데 애들은 어디다 두고 혼자 나왔어 ?"
  의아스런 표정으로 막 대꾸를 하려고 할 때였다. 안개 자욱한 건너편의 모랫벌로부터 열셋에 달하는 인파가 돌연히 몰려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다시 한 번 가슴이 섬뜩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무런 인기척도 남기지 않는 신속한 발걸음들이었다. 실로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일어설 것만 같은 정황이었다. 열 셋의 조성을 흘낏 살펴본 즉, 사내들이 다섯이요, 나머지는 앳된 처녀들이었다. 보면 볼수록 강한 의아심만이 눈송이처럼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한창 의혹에 잠긴 눈길로 바라볼 무렵이었다. 모랫벌의 다섯 중의 꽤 체격이 우람한 청년이 뱃사람들과 나를 향해 말했다.
  " 이 보슈. 제 때에 왔네그려. 근데, 형씨는 첨 보는 얼굴인데 ? 형씨도 갈매기 단원 맞아 ?"
  나는 주변의 분위기가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빨리 사실을 밝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냥 새벽 산책을 나온 거요. 나는 단순한 행인에 불과한 사람일 뿐이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대꾸를 하면서 나는 어느새 가방을 어깨에 메고는 모랫벌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러자,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지더니, 배에서 내린 청년들과 모랫벌의 사내들이 나를 에워쌌다. 이 번에는 슬그머니 오기가 끓어오르며, 서서히 피가 달아올랐다. 그 누구든 말이다. 육체적으로 나를 굴복시키려 든다면, 나는 절대로 그냥 참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의 내부에는 발작 직전의 파괴의 화신이 언제나 발작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내가 안개 노인을 찾은 원인도 결국은 이러한 마성(魔性)의 조절 때문이었다. 심성 수련을 쌓아, 결코 가볍게 마성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의도가 압도적이었다. 나는 이러한 야성의 격발(擊發)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재앙에 대해, 항시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나는 항시 나의 체격과 무술에 자만하는 터였기에 말이다. 나의 과격함이 불러올지도 모를 재앙의 깊이를 나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나를 두고, 타인들이 어줍잖게 실력으로 나를 굴복시키려 한다면 말이다. 이건 나의 자존심으로 볼 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내부로부터, 점차 뜨거운 피가 끓어 넘치려 하고 있었다.
  이 때였다. 색안경을 꼈던 사내가 색안경을 벗더니만, 나를 곧장 노려보며 말했다.
  "이 봐. 도대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 당신, 혹시 경찰 나부랭이 아냐 ? 만약에 그렇다면, 오늘 여기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순순히 분다면, 고통은 덜 받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
  나는 노여움과 터져 나오려는 야성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단호히 잘라 말했다.
  "잠깐만요. 몇 번 말해야 알아 듣겠소 ? 나는 단순히 산책 나온 사람이란 말이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트집을 잡으려는지 알 수가 없네요."
  나는 나의 심장이 뻑뻑하게 요동질치는 것을 느꼈다. 이제 광란에 가까운 발작이 목전에 닿았다는 것을 뜻하는 거였다. 나는 말을 하는 사이에, 필살기를 펼치기 위한 거리와 각도를 정밀하게 재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말과 거동에서 뭔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던 탓이었을까 ? 네모진 얼굴의 흑골단 사내가 나의 앞을 막아서며, 잔뜩 멸시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 새끼, 이거 아무래도 수상한 놈 아냐 ? 수상한 녀석이 아니고서야 꼭두새벽부터 뭐 하러 여길 얼쩡거리기는 얼쩡거려 ?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군. 피를 봐야만 제대로 불 모양인데 ……"
  이 말을 듣자마자, 인내의 한계점에서 떨고 있던 야성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려고 했다. 뒤야 어떻게 되든 지금까지는 참을 만큼은 참았다는 느낌이었다. 사내의 말투와 행동으로 봐서 나를 폭행하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내가 가장 못 견뎌내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력 도발에 대한 응징 본능이었다. 내가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무리들은 바로 무력으로 남을 굴복시키려는 존재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왼발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치솟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마음을 다시 한 번 절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힘과 무술이 있다고 해서 남들을 공격한다면, 나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말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술의 달인이었고,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는 터였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려고 시도하며, 마지막의 인내심을 다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일에 하등의 관련이 없으므로, ……"
  말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흑골단의 검정 그림자가 번쩍거리더니, 나를 향해 뛰어 뒤돌려 차기로 공격해 왔다. 순간적으로 피가 확 달아오르면서 나도 몰래 기합을 지르면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렇게도 추스르려고 애썼던 감정의 절제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면서, 나의 눈엔 살기가 뻗쳐올랐다. 몇 놈쯤 숨이 끊어져도 좋다는 생각이 들면서, 좀처럼 안 쓰던 필살기(必殺技)를 펼쳤다. 2연속 공중 뒤돌아 차기를 위시하여, 이단 옆차기 및 후려 차기가 나의 절기(絶技)였다. 손발과 함께 팔꿈치와 무릎 관절을 이용한 무차별 연속 공격을 감행했다. 손과 발끝에서 둔탁한 느낌이 들면서, 순식간에 너댓 명이 비명을 질러대며 나뒹굴었다. 이미 붙은 불이었다. 상대 쪽에서 백기를 들기 전에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게 뭐 공정한 경기였단 말인가 ? 이젠 설사 상대방이 백기를 든다 치더라도 말이다. 마지막 한 놈마저 거꾸러지기 전에는 나의 야성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뛰어 양발 옆차기로 또 두 명의 관자놀이를 차서 거꾸러뜨렸다. 나의 마음이 주먹질과 발질을 하는 게 아니라, 주먹과 발이 스스로 허공을 갈랐다. 나의 발길질과 주먹질이 허공을 가를 적마다 사내들이 볏단처럼 나뒹굴곤 했다. 입술이 터지거나 얼굴이 찢어져 나간 사내들은 벌써부터 모랫벌 저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한 사내를 일으켜 마구 발길질을 한 다음에, 경위를 물었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오늘 새벽에 나를 공격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느냐고 말이다. 30대 중반의 건장한 몸매를 지닌 사내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사내의 설명에 따르면 말이다. 흑골단이라 불리우는 사내들의 단체는 오랫동안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일본으로 팔아 넘겨온 조직이었다. 모두가 전과자 출신으로 결성된 이들에겐 소위 겁나는 게 없었다. 미래가 없는 그들이었기에, 당장 눈앞의 말초적인 욕정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직을 만들고, 욕정이 치솟으면 견뎌 내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길을 가는 아무 여자들이나 유린한 뒤에는, 일본으로 팔아 넘겨 온 터였다. 처음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직거래를 했었지만 말이다. 근래에 들어 갈매기단을 만난 이후부터, 부녀자들을 도매로 공급해 왔다는 거였다. 흑골단은 부녀자들의 인수 인계를 주로 야음을 이용하여 실행했다. 동력선인 밀항선은 바다에 띄워 놓은 채,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리없이 부녀들을 승선시키곤 했었다. 또한 기밀 관계상 접선의 장소를 수시로 바꾸어야만 했다. 오늘 새벽에도 갈매기단과 약속하여, 제비 바위 부근의 해역에서 부녀들을 승선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른 새벽부터 나타난 나를 상당히 의심스러운 존재로 여겼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나를 심지어 경찰 내지는 경찰의 앞잡이로 여겨 마구 공격하려고 했다는 거였다. 나는 사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서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내는 나의 표정 변화에 상당한 신경을 써더니, 계속하여 뭔가를 지껄이려고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피가 끓어 올랐다.
  문득 조금 전의 부녀들의 생각이 떠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모랫벌로부터 끌려온 부녀들은 폭력 사태의 와중에서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정말 청정한 놈인가를 자성해 보자, 의외로 자신이 없었다. 한 마디로, 처절할 정도로 허탈한 심정이었다.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다고 말이다. 두 차례의 날렵한 발길질로 사내를 혼절시킨 다음에, 핸드폰을 열어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매 바위 부근에, 부녀들을 전문으로 밀항시키는 나룻배가 표류하고 있노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서둘러 섬을 빠져 나가기로 했다. 더 이상 여기를 얼쩡거릴 기분이 아니었다.
  제부도를 벗어난 뒤엔 곧바로 차를 몰아, 인천의 학익동에 있는 나의 아파트에 닿았다. 들떴던 마음을 대강 추스른 뒤에야, 세면실로 가서 몸을 담갔다. 서서히 마음이 평정을 되찾으면서부터, 잠이 가물거리며 몰려들었다. 가까스로 잠을 이기며 목욕을 끝낸 뒤에, 거실에 앉아 스포츠 가방을 열었다. 청동으로 제작된 상자를 드라이버와 스패너를 써서, 열어 젖혔다. 상자 속의 내용물은 실망스럽게도 넓적하고도 얇은 다섯 장의 석판(石板)들이 전부였다. A4 복사지 크기의 석판들에는 섬세한 실선이 새겨져 있었을 뿐. 어떠한 언어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3mm 가량의 균일한 깊이로 새겨진 주홍색 실선들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 나는 두 시간 가량을 요모조모로 깊이 살펴보았지만, 끝내 어떤 단서도 잡지 못했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면, 일단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마침 창가의 침상에는 석양의 햇살이 환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침상에 드러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느새 돌아다니느라고 지친 의식이 함몰해 내리면서 나는 고요한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잠결에 귓전을 파고든 핸드폰의 음색은 촉촉이 젖은 여인의 음색이었다.
  "어머, 사형 ! 집에 계셨네요. 꾀하던 일은 잘 마무리지으셨어요 ? 여긴요, 국립 국악원이에요. 연주에 있어서 달인이신 어른들을 찾아 뵙고 조회를 하는 중이에요. 그럼, 그간의 경위를 차근차근히 전해 드릴게요. "

  여인은 여성 관리인으로 있는 친구인 현옥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인과 현옥은 여인의 말 그대로 막역지우의 사이였다. 현옥은 여인의 부탁에 쉽게 응했다. 그리하여, 환선굴의 채굴 과정에서 습득된 자료들을 조심스럽게 조사해 나갔다. 그러던 중, 놀랍게도 4주쯤 전에 발견된 죽편(竹片)이 눈에 띄었다. 죽편이란 대나무를 얇게 다듬어 만든 넓적한 대나무 조각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것은 주로 종이가 보편화되기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기록의 전수법이었다. 죽편에다가 작은 글씨로 기록된 것은 좀처럼 변질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현옥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여인의 눈에 드러난 것은 과연 놀라움 자체였다. 죽편에 그려진 것은 엄연한 악보였고, 조선조 인조 시대의 낙관이 찍혀 있었다. 악보의 제일 마지막에는 동백선(冬柏仙)이란 세 글자가 달필로 씌어져 있었다. 여인은 우선 죽편이 어디에서 발견되었던가를 현옥에게 물었다.
  환선굴 내부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동굴 밖으로 쏟아져 내려, 거대한 폭포를 이루는 곳. 거기는 다름 아닌, 선녀 폭포였다. 죽편은 선녀 폭포의 준설 작업 때에, 암석의 하단부에서 발견된 거였다. 죽편의 상단부에는 해동비음(海東秘音)이라는 글씨가 달필로 씌어져 있었다. 처음의 발견 당시에는 유지로 겹겹이 둘러싸인 목곽(木槨) 속에 들어 있었다. 목곽의 다른 내용물들은 목곽을 건져 올리는 과정에서 급류에 휘말려 유실되었다고 현옥은 말했다.
  여인의 눈에 드러난 죽편의 기록물은 놀랍게도 현악기인 거문고의 악보였다. 여인의 견식으로도 악보는 심오한 음계와 음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인은 그녀의 스승이자 거문고의 달인인 옥청자(玉靑子) 노파를 찾았다. 옥청자는 지금도 가끔씩 국악원에 들러 후진들을 돌보곤 하는 국내 굴지의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옥청자는 경기도 가평의 별장에서 거문고와 함께 노후를 격조 있게 보내고 있었다. 옥청자는 죽편의 악보를 쓱 한 번 훑어보더니만, 넓은 마루를 치웠다. 그리하여, 서재에 있던 거문고를 꺼내 마루에 단정히 앉더니만, 바로 거문고를 탄주(彈奏)하기 시작했다. 뚱기둥 뚱 뚱 뚜웅 ! 탁 트인 전원 주택을 넘나드는 저녁 안개처럼 음률은 자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옥청자의 면전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눈을 감고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점점 선율의 그윽한 정취에 매료되어 넋을 잃어 가고 있을 때였다. 때론 장엄하기도 했고, 때론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도 했다. 신묘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이처럼 그윽하고 아득한 느낌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마치 그믐날 밤에 바다 속으로부터 환한 야광충의 무리가 대규모로 줄지어 치솟는 느낌이었다. 선율은 강도에 따라, 때로는 광풍폭우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따사로운 아지랑이로 굽이쳐 흐르곤 했다. 선율의 실체가 부드러움인지 아니면 격렬함 자체인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뿐이었으랴 ? 선율의 흐름에 음영이 깃들어 있어서, 때론 암흑이었다가 때론 광명천지로 변하곤 했다. 어둠이 선율의 실체인지 아니면 밝음이 선율의 실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함이었다. 음률을 듣고 있을라치면 속이 편안했다가도 갑자기 속이 부글거리며 들끓곤 했다. 여인은 의식이 몽롱하여 도저히 제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 핏기가 바래지며,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일찍이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여인은 점차 허물어지려는 몸을 추스르느라고, 마루의 기둥을 붙잡고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점차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고, 의식은 가물거리다 못해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가늘게 잇몸이 벌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거문고의 탄주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군만마가 벌판을 질주하는 듯한 맹위가 잔뜩 서려 선율이 뜨락에 빗발치고 있었다. 여인은 도저히 더 이상은 견뎌낼 자신이 없음을 느끼면서 막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바로 이 때였다. '쨍 ! 쨍 ! 쨍 !'하고 세 차례의 크고도 맑은 현의 진동음이 들리더니 마침내 탄주가 끝난 거였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에서 여인은 놀라 깨어나 옥청자를 보았다. 옥청자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셔져 있었으며, 숨결이 고르지 않은 것이 심상치 않았다. 여인은 급히 일어나, 물수건으로 옥청자의 이마를 닦으며, 옥청자를 여인의 품에 안았다. 여인은 나직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 대관절 이게 어쩐 일입니까 ? 왜, 악곡의 연주가 진행되면서 전신의 힘이란 힘은 다 소멸되어 버리는 느낌이 들었죠 ? 전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저 혼자서만 느낀 상황이라면 모르겠는데, 선생님께서도 탈진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으니 말이에요. 혹시 이 악곡에는 제가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
  "그래, 은숙아 ! 과연 너는 나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구나. 네 말대로 이 악곡은 보통의 악곡과는 구성부터가 아주 다른 것이었다. 이 악곡은 단순한 기악곡이 아닌 기(氣)를 써서 연주하여 상대의 심혼을 끊으려는 살생지곡(殺生之曲)이네. 대관절 이 악곡을 어디에서 얻게 된 거냐 ? 소상하게 이야기해 주길 바란다. "
  여인이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말하자, 옥청자는 고개를 끄떡거리더니 묵묵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 동안 옥청자는 눈감은 채 말이 없다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만, 옥청자는 단정히 일어나 앉으며, 또랑또랑하지만 가라앉은 음색으로 말했다.
  "얘야, 수백 년 전부터 전설로 전해지던 얘기가 있었네. 누구나 들을 땐 건성으로만 들었었고, 그러다 보니 다들 쉽게 잊어버린 이야기가 있었지. 무슨 내용이냐 하면 말이다. 운기 역행(運氣力行)이라 했었지. 기(氣)를 일으키고, 힘을 떨쳐 낸다는 얘기였지. 나는 애초부터 말 같지 않은 소리로 간주해서, 귀담아 듣지도 않았었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릇에 담지도 못하는 현상을 놓고 이야기하는 터라 황당했던 거였지.
  하지만, 놀랍게도 그러한 분야가 실재(實在)한다는 사실을 근래에 들어서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잘 아는 물리학자의 이야기를 인용하노라면 말일세. 말하자면, 기(氣)란 일종의 에너지(energy)로서, 굳이 현대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전자기(電磁氣) 에너지라고 하는 거라네. 에너지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지 ? 사람의 세포 속에는 수많은 물질들이 있잖아 ? 각 물질들 속엔 전자(電子)라는 알갱이들이 득실거린다네. 전자가 뭐냐면 말일세. 음의 전기량을 지닌 최소 단위체이며, 진공에서는 거의 광속도(光速度)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알갱이라네. 모든 기(氣)의 원천은 세포 내 물질들의 전자들의 운동으로 기인된다 이 말이야. 오랫동안 수련한 사람들은 체내의 전자들을 수시로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왕왕 텔레비전 같은 데를 보면 말이다. 손바닥의 기를 써서, 강 건너편의 사람을 넘어뜨리는 장면을 종종 볼 수가 있지. 지금도 녹화된 비디오가 있지만 말일세. 하여간 기란 이렇게 신묘로운 영역일세. 그리고, 현악기의 연주에까지 기력을 실으려고 시도하던 많은 기인들이 있었네. 나의 추측으로 이 악곡의 저자야말로 기를 현악기에 운용한 기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네. 근데, 기를 전혀 단련하지 않은 사람의 탄주에서까지도 기파가 형성될 정도라니, 이게 놀라워. 만약에 내가 기(氣)의 수련자였었다면, 조금 전의 탄주로 둘 다 절명(絶命)했을지도 몰라. 아무튼 너무나 놀라운 일이야. 만약에 자네가 악보에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된다면, 내게 꼭 알려 주기 바라네. 도대체 악곡의 작곡자는 무슨 의도로 이러한 곡을 만들었는지 생각할수록 감이 안 잡혀.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 여인과 나는 수원역에서 만나, 상족암(床足岩) 동굴에 함께 도착했다. 여인이 옥청자를 만나, 악보의 단서를 알려고 한 반면에 말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된 본국검(本國劍)의 검보(劍譜)를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검도장(劍道場)의 관장으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검법의 운용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일단, 검의 운용에 관한 대략적인 감은 잡혔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는 검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나는 청동제 상자의 비밀을 고스란히 지킨 채, 상족암 동굴로 돌아온 거였다. 여인과 내가 동굴의 청소를 마친 뒤에, 목향(木香)을 피우며, 단정히 앉아 있을 때였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일며, 가방을 든 안개 노인이 막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사부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
  "하하하 ! 그래 자네들도 그간 잘 지냈었나 ? 물론 용무도 잘 보고 왔겠지 ? 이 번의 일정은 정말 의미 있는 기간이었어."

  노인은 청동제 상자 속의 석판에 새겨진 곡선형의 궤적들을 훑어보더니만 찰나간에 안색이 변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평온한 모습을 되찾은 노인은 곧장 여인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여인의 죽편으로부터 악보를 받아든 노인은 이 번에는 나지막한 탄성을 지르면서 고개를 끄떡거렸다. 잠시 그렇게 고개를 끄떡거리고 있던 노인은 활짝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네들 둘 다 제대로 임무를 수행했네.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네. 그런데, 여기에 관련된 내용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당히 복잡한 거라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설명하겠네."
  잠시 후에 여인과 나는, 노인과는 책상을 사이에 둔 채 동굴 바닥에 좌정(坐定)했다. 노인은 여인과 나의 제비 바위와 환선굴의 탐사 내용을 소상하게 듣고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노인은 아주 만족한 듯이 거듭 머리를 끄떡거리더니만, 나지막한 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자신의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노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낭랑한 목소리로 지난주의 여정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여인과 내가 동굴을 떠나던 그 날에 맞추어, 동굴을 떠났다. 노인이 달려간 곳은 변산 내소사 뒷산의 용추폭포였다. 용추폭포는 풍부한 수량을 지닌 폭포로, 연중 문인과 예술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폭포로부터 1 km쯤 떨어진 산 속에는 언제부턴가 움막집이 한 채 있었다. 움막집의 둘레엔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었으며,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가 폭포에 이르고 있었다. 노인이 찾아간 곳은 바로 움막집이었다. 움막집에 들어섰을 때는 석양빛이 따사롭게 나부끼던 저녁 어스름 무렵이었다. 움막집에는 밥을 짓는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노인이 움막집에 들어섰을 때, 부엌에는 칠순 가량의 백발 노파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노파는 등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흠칫 놀라며,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대관절 누구시오 ? 지난 10년 동안 여길 찾은 사람은 나 말고는 없는데 말이요."
  노인은 허리를 굽히며 아주 경건한 자세로 말했다.
  "혹시 변산의 월선녀(月仙女)가 아니오 ? 저는 유선문의 ……"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노파는 대번에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어머, 권성찬씨 ! 왜 이제야 오셨어요 ? 얼마나 기다렸었는데……"
   노파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목이 메어 흐느끼면서 노인의 손을 잡았다. 노인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노파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너무나 면목이 없고 미안해요, 선녀님 !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 정말 단 한 순간도 그대를 잊어 본 일이 없었어요.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에 관해, 정말로 대자연에게 감사 드리는 바이오."

  원래 노인과 월선녀는 40대 초반에, 처음으로 내설악의 물 맑은 계곡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산천 유람을 하며 도(道)를 닦는 자연인의 신분들이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마치 오래 된 지기처럼 속내를 털어,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알면 알수록 묘하게 끌려드는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당시에 갓 마흔이었던 월선녀와 마흔 셋이었던 성찬은 공교롭게도 둘 다 홀몸들이었다. 성찬은 위암으로 아내를 잃은 지 겨우 두 해를 갓 넘긴 시점이었다.
  당시의 월선녀는 성찬을 향해 자신의 서러운 정서를 차분히 털어 놓았다. 월선녀의 남편은 수도권 내의 시사성 기사를 주로 쓰던 주간지 편집 기자였었다. 운동권 출신이다 보니까, 점차 군사 정권에 대한 반감들이 기사문의 곳곳에서 내비쳐졌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수사 기관원들의 감시의 눈초리가 끈끈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월선녀에게는 남편에 대한 보호 본능이 싹터 올랐다. 그리하여, 월선녀는 남편에게 논조를 좀 완화시켜 달라고 사정도 하고 설득도 했다. 그런데도, 남편의 논조는 날이 갈수록 위험 수위에 접근했고, 월선녀는 바싹 긴장했다. 남편의 기사 내용이 군부의 부당성을 들먹거리면서부터는 월선녀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나가던 날 밤이었다. 검은 잠바의 기관원 셋이 들이닥치더니, 신분증을 내밀고는 남편을 압송해 가 버렸다. 월선녀가 지켜 보는 앞에서, 그녀의 남편은 힘없이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여인은 우선은 두려웠고, 다음으로는 어찌할 줄을 몰라 안절부절했다. 사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보았으나, 하나같이 혀를 차며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압송된 지 한 달만에야 월선녀의 남편은 폐인이 다 되어, 집으로 실려 왔다. 본인이 걸어서 온 것이 아니라, 차에 실려 온 거였다. 완전히 눈빛이 죽은 것이, 어눌한 정도를 이루 지적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눈에 불필요한 빛이 서려 있어, 때때로 광기마저 엿보이곤 했다. 떠듬거리며 흘려 놓는 말을 종합해 보면 말이다. 모진 전기 고문으로 온전한 의식을 되찾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밤중에도 침대에서 오뚝하니 일어나 앉아 신음을 흘리는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자다가도 숨을 헐떡거리며 식은땀을 내쏟다가는 기운이 다하여 의식을 잃곤 했다. 월선녀는 당장 남편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입원을 시켰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병원측의 제안에 따라, 장기간의 통원 가료를 시켰지만, 결과는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남편은 수사 기관으로부터 귀가한 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거였다. 한창의 나이에 남편을 잃은 월선녀의 심정은 비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자식마저 없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음대에서 국악을 전공한 월선녀는 그 길로 거문고만을 안고, 산천 유람에 나섰다. 산천 유람일지라도 마음이 즐거워야만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월선녀는 맑은 바람 소리를 들어도 피눈물이 괴었고, 좋은 경치를 보아도 슬픔이 북받쳤다. 햇살을 보나 달빛을 보나 모든 게 그게 그것일 뿐이었다. 마음 속으로야 처절할 정도로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무능력한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 피눈물로 세월을 삭여야만 했다. 집을 떠난 지 6개월만에 내설악에까지 이르러, 틈틈이 거문고를 탄주하며 시름을 달래곤 했다.  
  내설악에서 두 달째, 거문고를 뜯던 날의 석양 무렵이었다. 40대 초반의 사내가 대금(大 ) 한 자루만을 손에 든 채 계곡에 들어섰다. 한 마디로 선풍도골형(仙風道骨形)의 보기 드문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뭇사내들의 외모에는 별 관심도 없던 월선녀였다. 그런데도 성찬을 보자마자 월선녀는 전신이 감전되는 듯한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한 마디로 환상에 가까운 청순하고도 눈부신 이미지였다. 온통 가슴속이 서늘하게 젖어들 정도의 강렬한 충격이었다. 월선녀는 자신도 몰래 사내의 얼굴을 재차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또랑또랑한 정기가 넘쳐흘렀고, 얼굴 가득히 서글서글한 풍도가 서려 있었다.

  성찬의 경우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설악을 찾아, 모든 세상사를 바람에 날려 버리려고도 했다. 성찬은 완전히 실망 낙담하여 내면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산길을 타곤 했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 치는 대로 길을 나섰다. 한 마디로 완전히 혼백을 빼앗긴 채, 빈 껍데기만 흐느적거리는 형상이었다. 그러다가 석양이 물드는 내설악의 계곡을 대금 한 자루만을 들고 들어선 거였다. 마음이 텅 빈 상태라, 잠시라도 머물 수가 없는 심사였다. 그러다가, 계곡수를 벗삼아 거문고를 탄주하던 월선녀를 만난 거였다. 처음에는 의외의 장소에서 낯선 여인을 맞닥뜨린 일이 놀라웠다. 애초에는 힐끗 한 번 바라만 보고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월선녀를 바라본 순간부터 가슴속에서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섧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성찬은 여인의 입장을 헤아려 보았다. 여인이 자신을 만난 곳이 낯선 장소, 외떨어진 곳이 아닌가 ? 성찬은 혹시라도 월선녀가 자신을 만나, 두려워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리하여,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려 말을 건넸다.
  "조용히 쉬는 곳에, 이렇게 뛰어들어 죄송합니다. 원컨대, 한 소절의 음률만 듣고 싶은데, 청을 들어 주실지 모르겠군요."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요. 영산회상곡을 아시나요 ? 석가의 영취산(靈鷲山) 설법에 앞서, 삼라만상이 깨어 일어나는 정경을 나타내어 볼게요. 자, 그럼."
  바로 물결이 출렁거리는 듯, 거문고의 선율이 계곡을 적시고 있었다. 뚱기둥 뚱뚱 뚜우웅 ! 장엄하면서도 설움이 실렸고, 슬픔 중에서도 환희의 빛살이 내비쳤다. 월선녀가 거문고의 달인이라면, 성찬은 대금 연주의 달인이었다. 숙련된 연주가들이 아니면 낼 수 없는 음률들이 성찬의 귓전으로 빛살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지기를 만난 느낌이었다. 성찬은 자신도 모르게 대금을 입에 물어, 영산회상중의 상영산을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을 방황과 고뇌로 울음을 삼키다가 도를 깨치는 장면이 섬세하게 펼쳐졌다. 때로는 구천을 떠도는 원귀들의 한맺힌 울음 소리인 양, 곡조마다 피울음이 끓어 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천 날을 그리다가 연인을 만난 듯, 온통 그리움으로 뒤설레었다. 끝없이 장중하다가도 일순간에 실연기처럼 나부껴 흐르는 것이 정녕 음률의 진수를 듣는 느낌이었다. 10여 분이 좋이 흘렀으리라. 월선녀는 거문고를 세우고는 일어나, 성찬을 맞았다. 여인은 자신을 월선녀(月仙女)라고 밝혔다. 이름이냐고 묻는 성찬의 말에, 여인은 스승이 붙여 준 아호라고 답했다. 그 날 밤이었다. 오랜만에 지기(知己)를 만난 기분으로,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밤을 지새며 서로를 탐닉했다. 마음이 통하는 바였기에, 남녀의 교접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내리 일 주일간을 내설악에서 머물다가, 성찬은 월선녀와 작별했다. 2주가 지나면, 일본의 객원 교수로 근무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야만 했던 성찬이었다. 기약할 길 없는 이별이었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기약 없는 인생의 실체 앞엔 그저 서러울 따름이었다.

  노파는 움막집 객실에 걸레질을 하더니만, 노인을 안내하여 앉혔다. 노인과 노파는 감격에 벅찬 상봉을 한 터였다. 노파는 한없이 한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정말이지 몰랐어요. 왜 이제야 나타났죠 ? 좀더 일찍 나를 찾을 순 없었나요 ?"
  월선녀는 설악에서 성찬과 작별한 후론, 또 다시 거문고를 메고는 산천을 떠돌기 시작했다. 허기가 지면 산사(山寺)에 들러 기갈을 면하기도 하고, 날이 밝으면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부터 변산의 용추 폭포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으로 정착을 한 터였다. 노인은 월선녀와 회포를 풀기도 했지만, 월선녀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기공 수련에 있어서, 거문고의 탄주법은 신묘한 연구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내리 일 주일간을 월선녀와 지내면서, 노인은 가까스로 월선녀의 동의를 구한 터였다.
 
  노인은 여인과 나를 바라보며 한껏 눈빛을 빛내며,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마군이 가져 온 희대의 진귀한 검보(劍譜)에 대해 설명하겠네. 점차 동굴에도 실핏줄처럼 석양의 가녀린 빛줄기가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