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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2회
달그림자
손
정 모
2. 안개 노인
서슬 퍼렇게 눈부신 달빛이었다. 광막한 해변에는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로 한층 자욱한 분위기였다. 달빛에 휩쓸리는 안개 자락에는 태고의 신비로움까지도
은은히 내비치고 있었다. 해식 동굴(海蝕洞窟)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며, 흘낏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개 노인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30분이나
남은 터였다. 약속 장소는 쌍발(雙足)이라 불리우는 해식 동굴의 중앙 부분에 놓인
동촛대(銅燭臺) 앞이었다.
내게 남겨진 시간을 몸을 푸는 데에 활용하기로 했다. 나로 말하면,
180 cm의 신장에 공인 태권 5단의 무술인이기도 했다. 나는 경쾌한 몸놀림에 매료되어,
지난 10년 세월 동안을 부단히 태권도(跆拳道)로 수련해 왔다. 이러한 나를 두고
말이다. 세인들은 곧잘 해양과학 연구원이라는 나의 직업과는 전혀 이미지가 안 맞는다고
떠들곤 했다. 내 나이 서른 하나, 미혼인 나에겐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나이였다.
나는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해변에 우뚝 섰다.
한 차례의 심호흡을 크게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바다를 향해 양손에 천천히 힘을
실어 넣으며, 자연 준비 자세를 취하였다. 품새를 시연하기 직전의 동작을 말함이었다.
곧바로 5단의 품새인 지태형의 스무 가지의 동작을 힘을 넣어 경쾌하게 펼쳐 나갔다.
습관적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시연하는 터라, 중후함과 경쾌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였다. 열 다섯 번째의 동작에 이르러서였다. 옆차기한 왼 발을 내딛어 전굴세(前屈勢)를
취하며 오른편 주먹으로 중단을 지르려고 할 때였다.
새벽 공기를 찢는,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불시에 터져 나왔다.
"아악 ! 안 돼 !"
젊은 여인이 토해 내는 절대 절명의 비명 소리였다. 겁탈당하는 여인의
상황이 직감적으로 머리에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나의 몸은 쌍발 서쪽 해변으로
급히 달려나가고 있었다. 해변에서 가려진 암벽 지대를 돌아서자마자, 예상했던 장면이
펼쳐졌다. 험상궂은 삼십대 초반의 사내들 셋에 둘러싸여,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
막 발가벗겨지려는 순간이었다. 여인의 검정색 미니스커트가 막 벗겨져 내리는 순간이었고,
어느새 팬티가 하얗게 드러나고 있었다. 여인은 마구 발버둥질을 치며 발악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이 씨발년이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 아가리를 확 찢어 놓을라
!"
순간적으로 사내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일제히 여인을 향해 쏟아졌다.
헬스클럽을 다녔는지 다들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지닌 거구들이었다. 나는
현장에 닿자마자 사내들을 향해 그대로 솟구쳐 오르면서 필살기(必殺技)를 펼쳤다.
이단 옆차기에 이어, 뛰어 뒤돌려 차기 및 발꿈치 내리찍기를 종횡무진으로 전개했다.
사내들은 금세 얼굴과 배를 감싸 쥔 채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연이어 짙은 살기를
드러내며 재차 발길질을 가하자마자, 사내들은 황황히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이제 달빛 속에 남은 것은 여인과 나뿐이었다. 어느새 여인은 단정하게
옷을 여민 채, 나를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아마도 사내들과 격투할 적에, 내게서
분출된 살기에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여인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여인은 본능적으로 두 팔을 교차시켜 가슴을 감싸 안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더 이상은 두려워할 게 없어요. 잠시 마음을 추스른 뒤에
여기를 떠나지 않을래요 ?"
참담한 표정의 여인은, 날이 밝을 때까지만 내 곁에 머물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여인과 함께 쌍발이라 불리는 해식 동굴을 향했다.
동굴에 닿아 시계를 보니, 거의 정확히 약속 시간을 맞추고 있었다.
마침내 촛대가 자리잡은 동굴의 중앙 굽이에 이르렀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촛불이
훤히 비쳐들며, 촛불 앞에 백의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백발은염(白髮銀髥)의 노인이
눈부시게 흰 한복 차림으로, 돗자리 위에 가부좌로 앉아 말했다.
"흐음 ! 자네가 마종철이란 청년인가 ? 시간은 정확하게 지키는구먼.
자넨 골격이 좋아, 어딜 가나 염복(艶福)이 있겠네그려."
나는 억울한 느낌에 막 대꾸를 하려 들었지만, 노인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아냐, 됐어 ! 나는 조금 전 자네의 의로운 행동과 무술을 잘 구경했었네.
하지만, 감정을 절제하는 훈련은 아직도 한참 먼 것 같애. 바로 그러한 점이 나를
찾은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고 말이야. 자네의 눈빛에서 쏟아져 나왔던 살기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스스로 아는지 모르겠군. 아냐, 됐어. 자네는 당분간 나의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된다구, 알아 ? "
일흔 세 살의 나이임에도, 전신이 기력으로 충만된 노인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군 ! 자네가 나의 홈페이지(home page)를 통해, 면담을 신청해
온 것이 아마도 스무 번째였지 ? 역시 그랬었구먼. 자네는 확실히 나의 마음을 끄는
점이 많아. 내가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뭣 때문에 새벽의 바닷가에서 만나자고
했겠나 ? 자네는 나를 볼 수 없었지만, 나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자네를 관찰해 왔었네.
나의 모든 진전을 제대로 물려받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기에, 나는 꽤나 고심했었네.
그리하여, '안개 노인'이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인터넷을 통해 사방으로 나의
존재를 알렸었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체득한 모든 학문과 절예(絶藝)를 차근차근히
실어 나갔었네. 흠, 자네는 내가 동경대 출신의 이학박사(理學博士)라는 것도 알고
있지 ?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거든. 늙은이가 말했다는 것과 박사가 말했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크게 다르다 이 말이야. 설혹 박사가 아닐지라도 다들 나만큼 살아
왔으면, 인생의 박사급(博士級) 인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마군, 자네가 나를 찾은
첫 번째 이유는 나의 제자가 되는 일이라고 했었지 ? 지금까지의 언행으로 볼 때,
자네는 나의 제자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네. 하지만, 나의 제자가 됨에 있어서,
후회가 없겠는가를 묻고 싶네. 나는 자네의 진정한 마음을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네."
노인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벌써부터 말하려던 방법인데, 이제 때가 되었기에 자네에게
들려주겠네. 이 방식은 유선문(流仙門)을 창시한 신청웅(申淸雄) 조사(祖師) 이후로
줄곧 계승되어 내려오던 방식일세. 그러므로, 일체의 토를 달아서는 안 되네. 진정으로
자네가 나의 제자가 되고 싶거든 나의 앞에서 발가벗어야만 한다네. 원래 그 누구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엔 옷이란 게 아예 없었어. 옷이란 인간이 자라면서 인간과
짐승을 구별짓기 위해 만든 상징적인 장치에 불과할 따름이거든. 원초적인 인간 세계에서는
원래부터 부끄러움이나 더러움 같은 정서는 없었단 말이다. 다만 후천적으로 사람이
집단 생활을 하면서부터 의복의 편리함을 터득하게 된 거였지. 또한 교묘하게 마음을
위장하고 치장하는 데에도 의복이 큰 역할을 했었지. 내가 자네를 제자로 삼기에
앞서서 발가벗으라고 하는 이유가 뭔지를 알겠나 ? 더 이상의 인위적인 가식을 떨쳐
버리라는 상징적이고도 심오한 의식 때문일세. 이러한 의식이 공공연한 장소에서
치러진다면, 음란성으로 매도될 우려도 없지 않지만 말일세. 이 의식은 본문(本門)의
가장 경건하고도 엄숙한 의식들 중의 하나라네. 그 어떠한 도(道)라고 할지라도 가식을
떨치지 못한다면 경지가 높지 않다네. 옷을 벗고 싶지 않다면, 그만 두고 여기를
떠나도 돼. 자, 자네의 마음을 내게 들려주게나."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노인은
당장 여인의 행동을 제지하며, 여인을 향해 말했다.
"이 보게, 이름이 백은숙이라고 했나 ? 나이는 스물 다섯에 직업은
도예가라고 했지 ? 늘씬한 몸매에 빼어난 외모라, 숱한 사내들의 충분한 선망의 대상이
되겠구먼. 날도 밝지 않은 새벽에 어디로 가겠다는 건가 ? 그리고, 마군이 당장 우리
앞에서 발가벗는 것은 아니니까 잠시 기다려 주게나. 여기를 떠나고 싶다면 마음대로
가려무나. 절대로 붙잡지는 않을 테니까. "
여인은 돗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올리려다가, 살그머니 고개를 숙이며
다시 앉았다. 노인은 여인을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옷에 대한 나의 관점을 조금 전에 명확히 설명했는데, 잘 들었지
? 백군, 이러한 규율은 본문의 엄격한 율법과 같은 것이라네. 그리고, 마군 ! 자네는
이제 자네의 진정한 마음을 보여 주든가 아니면, 되돌아가든가 하는 일만 남았네.
자, 당장 대답해 주길 바라네."
당혹스럽게도 노인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굳이 인천의 생명과학 연구소에서부터 천리 길을 찾아왔던
이유를 말이다. 그건 애절할 정도로 노인을 만나고 싶다는 염원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노인을 만나려면, 노인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노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옷을 벗어야
함을 말함이었다. 그래, 큰 일을 위해선 작은 일쯤이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나는 상의를 벗으려고 자세를 취하며 흔쾌히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바로 이 때였다. 안개 노인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옷을 벗더라도 여기서는 아니야. "
그러면서, 노인은 부연하여 설명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본문의 엄격한 규정이야. 우선 맑은 강으로 나가 목욕 재계를 한 다음에,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고 했다. 모닥불의 북쪽에는 사부가 좌정(坐定)하고, 남쪽에는
제자가 나신으로 삼배를 올려야 한다는 거였다. 나는 망설임이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
"흐음, 역시 마군은 마음가짐에 있어서 제자가 될 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네. 마군, 자네는 잠시 좀 기다려 주고 말이야. 그리고, 백군 ! 자네는
어찌하여 변고를 당했는지 경위나 좀 들려주게."
여인은 잠시 자세를 바로잡더니, 고개를 들어 노인과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여인은 겁탈당하던 당시의 상황을 차분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친구들과의
회식이 늦게 끝나, 새벽에 헤어지던 순간이라고 했다. 길 모퉁이로부터 느닷없이
괴한들이 달려나오더니 입을 막은 채, 여인을 승용차로 납치했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곧장 해변에까지 끌려 와 막 봉변을 당하려던 판에 나에게 구조되었다는 거였다.
여인은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에, 친구들과 공동으로 도예점(陶藝店)을 차려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인은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마치더니, 노인을 향해
과감한 제의를 했다.
"혹시 제자를 한 사람 더 받을 생각은 없으세요. 저도 왠지 제자가
되고 싶어요."
노인은 여인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한 번 검토를 해 보겠네. 우리의 만남이란
고작 마군이 자네를 구해 준 뒤부터가 아니었겠나 ? 한 마디로 자네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단 말이다. 그래서, 대답이 쉽지 않다는 거야. 다만, 한 가지는 허용해
주겠네. 오늘 하루만은 우리와 함께 있도록 해 주겠네."
"어머, 정말이세요 ? 그 정도만으로도 너무너무 고마워요, 할아버지."
노인은 일순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동굴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며
말했다.
"흠, 몇몇의 발자국 소리가 이 쪽으로 들려오고 있군. 아마도 여기에
있다간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이 능선을 감돌아 후면으로 가자구. 거기엔 또 다른
석굴(石窟)이 있고, 세상과는 단절된 별천지라네. 상족암(床足岩) 군립 공원에서도
알지 못하는 비경인데, 내가 가끔씩 도를 닦는 장소라네."
여인과 나는 곧장 쌍발을 빠져 나와, 소로(小路)를 따라 급히 이동했다.
점차 날이 밝아지면서,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쌍발로부터 십여 분쯤 이동했을
때였다. 산악이 해변을 따라 치솟는 듯하다가, 갑자기 멈춰 버린 듯한 곳이 있었다.
바다를 향한 경사면은 수직을 이루었고, 다복솔이 무더기로 자란 곳이 있었다. 노인은
서서히 발을 뻗어 이끼 낀 벼랑쪽을 한 길쯤 타 내려가더니 섰다. 그러더니, 위를
올려다보며 여인과 나를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여인을 바라보며 어쩔 것인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여인은 단호한 눈빛을 보이더니, 발을 뻗어 벼랑을 타 내려갔다.
여인의 착지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나도 조심스럽게 벼랑을 타 내려갔다. 다복솔이
우거진 지역에 내려서고 보니,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동굴의 입구가 나타났다. 구부린
동작으로 겨우 한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로 동굴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 입구를
지나고 보니, 놀랍게도 형성되다가 만 듯한 해식 동굴이 있었다. 분명히 연흔이 있었고,
파도의 소용돌이로 침식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동굴 형성기에는 바위 벼랑에까지
거의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으리라. 동굴의 크기는 스무 명이 원형으로 팔을 벌려
설 만한 넓이였다. 또한 동굴의 평균 높이는 4 m쯤 되어 보였다. 벼랑 가까운 곳에서
형성된 동굴인 듯, 동굴의 측면으로 희미한 빛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동굴 중앙엔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서책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뭔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어,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에는 안에서 밖을 가릴 수 있는 목재 출입문까지 달려
있었다. 이윽고, 노인은 책상 앞에 앉은 채 형형한 눈빛으로 여인과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다들 내 자리 맞은 편에 앉게."
노인은 동굴의 내부를 찬찬히 훑어 본 뒤에, 시선을 여인에게 던지며
말했다.
"이 보시게, 백군. 나는 백군과 약속한 바는 없기에, 이제 백군은
마음대로 떠나도 되네. 지금 이 시각쯤이면 안전한 때라, 더 이상 불량배들이 덤벼들지는
않을 거네."
여인은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흑색의 양장 차림새로, 노인을 향해 다가서면서
말했다.
"저 역시 어르신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싶어요."
여인은 말을 하다 말고 흘낏 나를 한 번 바라본 뒤에 말을 이었다.
"저는 마종철씨께서 저를 구해 준 바로 그 순간부터 인생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대관절 사람들의 욕정이란 무엇이며, 왜 욕정에 설쳐 대는지를 모르겠더라구요.
그리하여, 이제부터라도 인생 자체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어르신을 만나뵙게 되어
잘 되었다 싶더군요. 저는 솔직히 이 순간에도 어르신과 마종철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몰라요. 하지만, 쌍발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두 분의 대화와 행동으로 줄곧 판단해
보았어요. 그리하여, 지금까지 제가 얻은 결론은 저 역시 어르신의 제자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 배워서, 인생을 풍족하게 살고 싶었어요. 어떻게
절 제자로 받아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
노인은 하얗게 뻗어 내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만, 형형한 눈빛으로 여인과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자네들 둘 모두가 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거지 ? 그렇다면,
다들 일어나서 나를 따라 오게나. "
잠시 후에 걸어서 20여 분 거리의 강가에 도달했다. 때는 하늘빛이 눈부시게
맑은 아침 8시 무렵이었다.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유량이 풍부하고 인적이라곤 없는
외딴 곳이었다. 물은 맑기가 거울 같았으며, 강변에는 갈대숲이 끝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광활한 갈대숲이라, 숲 속에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못 알아볼 정도였다.
노인의 지시에 따라, 여인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강변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여인은 상류쪽에서 목욕을 했고, 나는 하류를 택해 멱을 감았다. 노인은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앉아 심성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여인과 나는 수건으로 나신(裸身)의
물기를 닦으며 모닥불 앞에 섰다. 때를 맞춰, 심성 수련을 마친 노인이 두루마기
자락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모닥불의 북쪽에 펼쳐진 돗자리 위에
단정히 가부좌를 하며 앉았다. 여인과 나는 발가벗은 몸으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노인을 바라보며 나란히 섰다. 이윽고, 경건한 자세로 세 차례의 큰절을 올리며 스승을
맞는 예를 올렸다. 잠시 후에 단정히 옷을 여민 채, 노인의 앞에 나란히 앉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산새들의 소리는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노인은 흰 수염을 어루만지더니, 감회가 새롭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자네들 둘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가 된 걸세. 앞으로 나와 더불어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를 비네. 다시 동굴로 돌아가자꾸나.
네모진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잠시 후에 여인과 나는 노인과 마주앉았다. 노인은 잠시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더니만, 침중(沈重)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하게도 이 동굴엔 짝을 제대로 이루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셈이야. 잠시 후에 자네들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네.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먼저 나의 이야기를 풀어 놓겠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털어 놓겠네. 우선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을 좀 알아야겠지 ?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다시 말할 수 없는 조화(造化)가 아니겠나 말일세. 그런데, 게다가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할 수 있기까지 하다니 말일세. 이러한 느낌의 공유를 통해서, 우리는 틀림없이 또 다른 세계와 만나리란 사실 때문이야. 그러다가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군, 저기 뒤쪽 벽 부근의 흰 가방을 열어 음식을 좀 가져 오게. 잠시 후에 책상 위에는 귤과 배를 비롯한 과일이며 과자 등속이 쫙 깔렸다. 언제 준비되었던 것인지 꽤 신선도가 유지되어 있는 음식물들이었다. 노인은 나와 여인을 흘낏 바라보더니, 침착한 모습으로 말했다. 자, 음식을 좀 들면서 이야기를 해 나가기로 하자꾸나. 약간의 시장기가 돌던 판이라, 셋은 음식을 섭취해 나가면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다시 옛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1926년의 봄철이었지. 나의 이름은 '권성찬(權成贊)'이고, 내가 출생한 곳은 충남 서천의 갯마을이었네. 당시에는 어디를 가나 허기와 굶주림으로 지친 사람들의 일색이었었네. 나의 기억에 남는 지난 시절이란 오로지 언제나 스산하고 궁핍한 환경일 따름이었었네. 이야기를 술술 해 나가다가도 노인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곧잘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하는 곳곳마다 휩쓸려 나오는 슬픔과 연민들의 편린들이 곧잘 느껴지곤 했다. 왠지 모를 숙연함과 처연함이 동굴 가득히 차 오르는 느낌이었다.
1950년 5월 초순의 일이었다. 늦봄이라 곳곳에 널브러진 보리밭을
따라선 연신 봄바람이 신록의 색채로 감미롭게 남실거리고 있었다. 3년 전에, 성찬은
동경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는 귀국하여, 곧바로 군복무에 들어갔었다.
제대하기 직전인 1년 전, 휴가 기간중의 11월이었다. 마침 시제일(時祭日)이라, 선산
묘역에 시사를 올리고 오던 성찬의 아버지가 성찬을 불렀다. 성찬은 여독이 덜 풀린
얼굴의 의아한 표정으로, 마당에 내려서며 아버지를 맞았다. 아버지는 마당에 들어서며
아들인 성찬에게 입 속의 고기를 꺼내 주며 말했다. 얘, 성찬아 ! 오늘 모처럼 문중
사람들이 다 모였더구나. 문중의 젊은이들이 서서히 모여들어 이제 우리 문중도 제법
번창한 느낌이 들더구나. 내가 산을 내려오면서 돼지고기를 입에 넣었지만, 질겨서
그런지 좀처럼 안 씹히더구나. 이걸 네게 줄 테니, 잘 씹어 봐. 그 때 성찬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면전에서 고기를 받아 씹어 삼켰다. 그 당시의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아, 보건소에서 지급된 알약을 복용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성찬은 건강한
몸이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던 터였다.
이제 신록이 한껏 그윽한 색채로 물들어 가던 1950년 5월 초순이었다.
제대를 하고 고향인 시골의 들판을 찾아, 보리밭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편지로
아버지의 투병 소식은 들었지만, 고향길을 들어설 무렵쯤 해선 여간 불안스럽지가
않았다. 왠지 자꾸만 눈이 감겨들었고, 형언키 어려운 서글픔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었다.
생후 처음으로 예감이란 것을 느낀 터였다. 마을 건너편에 당도하니, '권씨 상가
입구(權氏喪家入口)'라는 안내 종이가 마을 전봇대마다 부착되어 있었다. 안내 쪽지를
보자마자, 갑작스레 오금이 저려 오며 전신이 후들거리며 떨려 왔다. 아,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가슴이 갑작스럽게 오므라들고 숨길마저 답답해지다가는
급기야 눈가로 이슬이 맺혀 흘렀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른들이며 어릴
적의 친구들이 다들 한 마디씩을 건넸다. 자네, 이제 왔는가 ? 그간 자당과 자네
여동생이 병구완을 하느라고 무척 고생이 심했네. 어서 가 보게.
집에 들어서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며 숨 가쁠 정도로 말을 건넸다.
아이구, 이제야 상주(喪主)가 도착했네. 성찬이 엄마요, 아들이 왔다니까. 그리하여,
부엌을 지나 뒷마당에서 성찬은 곧바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성찬을 만나자마자
성찬의 등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놈아 !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너를 못 볼 줄 알았다니까. 제대를 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와야 할 텐데 하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아니 ? 이제 아버지는 안심하고 눈을 감으실 수가 있겠구나.
아이고, 성찬이 아버지요, 아들이 왔으니 좀 일어나 보소. 북망산천으로 뭐가 그리도
급하게 달아났소 ? 이 답답한 심사를 어이 할꼬, 흐흐흑 !! 성찬은 뭔가 말로 대답하려고
했지만, 너무나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라, 입술만을 깨물었다. 밤이 되었다. 다음
날이면, 발인을 하게 되는 터였다. 시골이라, 마당에는 커다란 장작들이 수북히 쌓였고,
몰려 온 문상객들로 마당은 북적거렸다. 집을 에워싼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한결 청아하게 들려오는 밤 10시 무렵이었다. 상여계를 맡아 해마다 장례를 주관하는
계원들이 모여들어, 상여를 어르기 시작했다. 상여 어르기란 상여를 운반하기에 앞서
계원들간에 힘의 분배를 위한 예비 동작이었다. 어르기를 통해서, 실제로 상여를
메고 갈 때, 일사불란한 진행을 하게 되는 터였다. 요령 소리를 쩌렁쩌렁 울리며,
상두꾼이 만가를 구성지게 엮어 나가기 시작했다. 만가는 가장 향토색이 짙은, 각
지방 고유의 슬픈 노래 가락들이었다.
강산이 변하여, 바람이 된다.
어화노, 어화노오, 어라리 영차 어화노.
인생 칠십이 풀잎의 이슬이라.
어화노, 어화노오, 어라리 영차 어화노.
……
휘황찬란한 조화(弔花)로 치장된 상여가 상두꾼들에 의해 넓은
시골 마당을 돌기 시작했다. 문상객들은 원을 이루며 빙 둘러 구경을 하고 섰으며,
서서히 마당에선 화톳불이 타올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염은 평소에
고인이 애지중지했던 물건들을 차례 차례로 삼키고 있었다. 타서 바람에 나부끼는
흰 연기들만 허공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성찬은 아버지의 유품을 태우고 있는
사촌 여동생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들었다.
1932년 1월 중순의 일이었다. 성찬의 집은 너무나 빈한한 농가라, 도저히
성찬을 공부시킬 만한 여건이 못 되었었다. 느닷없이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생인
성찬을 마루로 불러 앉혔다. 밭일을 나갈 차림새 그대로 마루에 앉더니만, 종이를
말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뱃재를 재떨이에 톡톡 털며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더니만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성찬아, 지금부터 하는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네가 알다시피,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해. 종중(宗中)산 기슭에 이렇게 의탁해서 살고 지내잖니 ?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는 우리 문중의 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 것이다. 대대로 명문가로 뿌리 내려, 지방 유림(儒林)을 좌지우지하던 위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비록 나라를 잃어, 할 말도 못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너는 자랑스런 안동 권씨의 후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밥을
먹으나 잠을 자나, 언제라도 문중의 긍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야. 우리 집만
해도 그래. 너의 할아버지만 난봉으로 허송 세월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겠지. 때로는 삶이란 것이 어쩜 운명의 지배를 받기도 하는 모양이더라. 다 지난날들의
이야기이고,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공부에 관한 일 때문이야. 나는 네가 박 첨지의
수박밭을 엉망진창으로 발로 뭉개어 놓은 것도 탓하지 않았다. 너의 친구들 넷과
함께 벌였던 그 일 말이야. 어릴 때는 다들 몇 번씩은 장난질도 치면서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법이거든. 하지만, 성찬아 ! 이제는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을 바라보는
시점이야. 너는 올해 연말이면 입학 시험을 치러야 할 텐데, 자신 있니 ? 네가 알다시피
아버지는 땅만 파는 농부일 따름이다. 네게 잘 해 줄 재력이 없단 말이다. 재력은
고사하고 밥도 먹기 힘들지 않느냐 이 말이다. 얘, 성찬아 저기 문간에 서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기구의 이름이 뭔지 아니 ? 똥 장군 말인가요, 아버지 ? 그래, 바로 똥
장군 말이다. 나는 만약에 네가 중학 시험에 떨어지는 날이면 어쩔 도리가 없어.
너도 별 수 없이 나를 따라 농사꾼이 될 수밖에 더 있겠냐 ?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서
저 똥 장군에 똥물을 가득 채운 다음에 말이다. 저걸 등에 지고는 뒷밭에 가서 거름으로
밭이랑 가득히 붓는 거다. 성찬아, 내가 너에게 들려줄 말은 이 말밖에는 없다. 앞으로
절대로 이 말을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는 무엇보다도 나의 성미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만약에 네가 정말로 당당한 사내 녀석이라면 말이다. 나의 말을
잘 새겨듣고 열심히 공부해 주었으면 해. 그리하여, 퇴락한 문중의 위세를 일으킬
수 있는 재목이 되어 준다면 말이다. 더 이상 내가 너에게 바랄 원이 뭐가 있겠니
?
세월이 흘러, 성찬이 중학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집까지는 거리가 멀어, 버스를 한 시간 가량이나 타야만 했다. 마침 점심
시간이어서, 시장의 골목마다 식사를 하려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성찬의 아버지는
한복 차림으로 잠자코 성찬을 대중 음식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식당에 들어서서는
차림표를 죽 둘러보더니만, 쇠고기 국밥을 한 그릇만 시켰다. 의아스러운 눈길로
성찬이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말했다. 얘야, 나는 아까부터 왠지 뱃속이 불편해서
통 음식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까, 너만 식사를 하도록 하려무나. 아버지의 거동을
죽 지켜보던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두 그릇의 국밥을 내 왔다. 아버지는 금세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 보소, 아주머니요, 한 그릇만 시켰잖소 ? 잘 들었어예. 하지만, 이건
내가 영감님께 그냥 드리는 깁니더. 자식만 음식을 주는데, 자식의 목에 어떻게 음식이
넘어 가겠소 ? 어린 성찬에게도 아주머니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결코 이전에
소년으로서는 느끼지 못했던 정서였다. 아버지는 대뜸 응답했다. 어이구, 이런 고마울
데가.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눈빛과 아주머니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만나, 빛살처럼 날아올랐다. 성찬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날의 아버지의 공허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당당한 기세마저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공허한 모습 말이었다.
성찬은 그림에는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도내의 그림
대회에만 나가면 언제나 으뜸상을 받았다. 마을에서는 곧잘 이웃 어른들의 초상화를
연필로 그려 주곤 했다. 초상화라고 해야, 고작 도화지에 연필로 소묘한 정도였지만
말이다. 마을 어른들은 그림이 너무나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기뻐하면서 칭찬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성찬의 아버지는 성깔이 불 같이 급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같은
내용의 말을 두 번 묻지 못했다. 만약 그럴라치면, 밥그릇이든 부지깽이든 간에 허공을
날기가 십상이었다. 성찬이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느낀 점은 오로지 '무섭고 겁나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그러한 아버지였는데도, 어쩌다가 활짝 웃으면 온 집안 가득히
행복이 실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성찬의 아버지가 성찬의 그림 솜씨만은 높이 평가해
주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더러 성찬을 불러 초상화를 그려보라며, 한 시간
가량이라도 꼼짝없이 앉아 있곤 했었다. 성찬은 아버지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그림에
대하여 자긍심을 느꼈다. 가을철이면 으레 참새들이 온통 논으로 몰려다니며 벼를
쪼아먹곤 했다. 아버지가 소작으로 붙이는 논에도 더러 참새가 떼지어 몰려들곤 했다.
참새가 몰려올 무렵이면, 성찬의 아버지는 성찬을 불렀다. 박으로 된 바가지들을
펼쳐 놓고는 성찬에게 허수아비의 화상을 그려 달라고 했다. 성찬은 붓에다가 담뿍
힘을 넣어, 무시무시한 형상의 허수아비의 얼굴을 그리곤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함께 가을 바람이 나부끼는 들녘에 서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곤 했다. 성찬의
머릿속으로 연신 가을 바람에 나부끼는 아버지의 흰 수염이 구름장처럼 떠올랐다.
어이, 권성찬씨 ! 상주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어 ? 어서 상여에 올라,
아버지의 노자 돈을 풀어놓지 않고 뭐해 ?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을 비롯한 친구들이
몰려와 이구동성으로 정신없이 떠들어대었다. 성찬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온통 은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근래의 1년간을 아버지는 열차가 지날 적마다 성찬을 줄곧 기다려 왔다고 했다. 집
앞 밤나무 밑의 평상에 앉아서, 곧잘 마을 건너편의 열차를 기다리곤 했었다. 열차가
사라질 때까지 우수에 잠긴 채,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는 거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고 성찬은 눈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찬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찬은 아연 긴장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비록 슬픔이 가슴 가득히 끓어오를지라도 말이다. 일단은 아버지의 영혼을 잘 보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뜻 상여의 줄을 잡고 상여 위에 뛰어 올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두꾼들이 상여를 어깨에 메고는 마당을 돌기 시작했다. 요령
잡이 상두 몰이꾼의 만가 선창으로, 장내는 이내 슬픔에 젖어들었다. 성찬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상여 줄에 꿰매었다. 그렇게 서너 차례나 지폐를 꺼내 줄에 꿰맨 후에야
성찬은 마당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온 몸으로 나른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화톳불이
점차 사나운 기세로 타오르면서 장내가 환히 밝아졌다. 여전히 문상객들은 이리 저리로
몰려다니며 발인 전야의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문득 성찬의 눈에,
화톳불의 언저리쯤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눈에 띄었다. 온갖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분위기가 그녀들의 전신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찬에게
이 때처럼 가족의 정서가 선명하게 부각된 적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이 때만큼 나에게 인간의 섬세한 정서가 입체적인 섬세함으로 다가왔던
적은 없었어. 안개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이야기를 끝내며, 눈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번에는 여인의 차례라는 듯이. 노인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던
여인의 눈시울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여인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흘낏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동굴 안에는 정적이 내려 깔렸다. 이윽고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문을 열었다.
올해 스물 다섯의 백은숙의 가슴속에는 내내 잊지 못할 처절한 슬픔이
있었다. 2년 전인 1997년 9월의 일이었다. 그간 2년간을 줄곧 연인 관계로 지내 오던
남성은 심창준이라고 했다. 그는 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결혼하여
함께 가자고 여인에게 제안했었다. 하지만, 여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결혼할 여건이
못 되는 어려운 상황이었었다. 여인은 창준에게 그녀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시킨 뒤에,
2년 뒤에 결혼을 하겠노라고 약속했었다. 그리고는 김포 공항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창준을 배웅했었다. 일단 창준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는 지금껏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창준으로부터 연락은 비교적 자주 오는
편이었었는데 말이다. 6개월 전쯤부터는 바쁘다는 이유로 점차 소식이 뜸해지더라는
거였다. 약간은 의심이 되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1개월 전에 창준은 미국에서는 함께 하지 않고서는 외로워서 못 견디겠노라고
말했다. 그러한 외로움으로 인하여, 이미 6개월 전부터 새로운 여인을 사귀었다는
거였다. 상대는 같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한국의 유학생이었고, 같은 처지라서
쉽게 가까워졌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여대생과 결혼하기로 하고 동거에 들어갔으니까,
잊어 달라며 소식을 보내 왔었다.
여인은 소식을 받자마자, 곧장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시카고 주립 대학의
근교에 있는 아파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설마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파트를 방문한 순간, 행여나
하는 기대는 처절한 배신감으로 돌아왔다. 연이어 배신감은 극도의 절망감으로 변하여,
여인의 가슴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아파트의 문을 열자마자, 정이 담뿍 서린 얼굴로
창준과 동거녀(同居女)가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다. 거실에서 바라본 동거녀는 확실히
빼어난 미모에 다정함이 담뿍 서린 여인이었다. 창준과 대화를 하는 내내 여인은
설움에 목이 메어 눈물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창준은 여인에게 말했다. 비록 지난
2년간의 사귐은 잊을 수 없는 거였지만 말이다. 미국이란 풍토가 외로움이 가득한
사람들은 견뎌 내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말했다. 여인은 사리를 따져 말했었다. 그렇게
외로웠으면, 다시 국내로 건너와 여인을 데려갈 생각은 왜 못 했느냐고 따졌다. 이
대목에 이르러, 창준은 담배를 꺼내 물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난들
그 생각을 못 했겠어 ? 애초부터 미국에 건너오기 전에 내가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어
? 그런데도 넌 2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고 했잖아. 난 도저히 그 기간을 참고 견뎌
낼 자신이 없었어. 이제 너무 따지려 들지만 말고,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으면
해. 다행히 우리의 교제는 순수했었기에, 순결을 지켜 온 상태이잖아 ? 이제 너의
마음만을 바꾼다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봐. 너무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너의 밝은 미래가 되기를 빌게. 공항까지 전송해 줄게. 그리하여, 처절한 이별의
아픔을 안고 국내로 돌아왔고, 지금까지도 사무치게 창준이 그리워진다는 거였다.
여인은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를 할 무렵에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어서 흐느껴 울었다.
점차 나의 가슴에도 새파란 인광(燐光)이 타는 듯한 시린 여운이 드리워졌다.
마침내 내 차례였다. 내가 처했던 슬픔을 어찌 일일이 펼쳐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간경화(肝硬化)로 인해, 나의 첫 연인인 선옥을 잃은 아픔을 내 어이 절절히 나타내리요 ? 또한 연인이었던 지연의 뼛가루를 짙푸른 서해에 흩뿌린 사연들은 눈물 없이 어떻게 설명하리요 ? 두 번 다시 과거의 일을 타인들에게 설명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만의 소중한 세계를 타인들에게 알린다는 것은 썩 기분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나의 아픈 과거사를 말한다면, 도저히 나 자신을 가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눈을 감은 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놀랍게도 이 때 나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기억 속에 아슴푸레하게 묻혔던 과거사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잠겨 들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시골 농가의 바로 이웃집에 자식이라곤 없는 50대 중반의 현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마을을 지켰던 터줏대감이기도 했다. 자식이 없어서인지 현씨는 수시로 어린 나를 귀여워했고, 때때로 말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현씨는 근동에서는 제일 가는 배나무 농장의 주인이었으며, 성격이 호방하여 친구들이 많았다. 현씨는 농부였지만, 유난히 시조나 판소리 등의 악곡에 심취하곤 했다. 하여, 수시로 노래 가락을 배운답시고, 남도의 들녘을 떠돌곤 했다. 그는 농사일을 하다가도 툭하면 손을 털고 노래 가락을 찾아 남도를 떠돌곤 했다. 특히 그의 방랑벽은 배꽃이 벙그는 봄철이면 유달리 심했다. 4월말이라, 남도의 들녘에는 흐드러지게 핀 배꽃의 향기로 가는 곳마다 그윽한 정취로 설레었다. 자정이 가까운 밤이었다. 한창 '죄와 벌'을 읽느라고 골몰해 있을 때였다. 창호지로 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았더니, 현씨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잠시 떠나기로 하고 현씨를 따라 그의 과수원으로 갔다. 아마도 그의 과수원을 직접 방문했던 때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과수원의 크기에 완전히 압도당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넓은 규모의 과수원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널브러진 벌판 가득히 심겨진 것은 오로지 배나무 일색이었다. 마침 보름달마저 허공에 떠서 한껏 빛을 내뿜으니, 온 세상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감미롭기 이를 데 없는 봄바람이 수시로 배꽃을 어루더듬으며 남실거렸다. 미풍에 취한 듯, 흐드러지게 만발한 배꽃들이 길길이 춤을 추며 달빛에 부서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저절로 달뜰 수밖에는 없는 정경이기도 했다. 현씨는 밤이슬에 젖은 하얀 배꽃송이를 꺾어 나의 손에 쥐어 주면서 살짝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노래 가락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두어 소절을 들으면서부터는 서서히 그의 노래 가락에 빨려 들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의 목소리에 어쩜 저렇게 애절하고도 서러운 정한이 서려 있는가하고 놀랐다. 놀라움은 금세 부러움으로 변하였고, 부러움은 존경심마저 불러 일으켰다. 노래 가락은 달빛이 사위어 가던 새벽 무렵까지도 지속되었었고, 나는 선동(仙童)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 때처럼 황홀한 몽환의 세계에 젖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현씨의 방랑벽을 자연스런 몸짓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어느새 배꽃이 벙그는 봄철을 기다리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내가 고교 1년생이었을 때였다. 서해의 변산에서 날아온 전보를 받고 현씨의 부인이 떠난 지 일 주일만이었다. 현씨는 얼굴 가득히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채,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거였다. 자식 없는 이웃이라, 평소에 지내던 정으로 말이다. 그 날의 빈소를 지키며 밤을 꼬박 지샜던 기억이 아슴푸레하게 떠올랐다. 내가 현씨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주자, 여인은 물론이요 노인까지도 숙연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세 사람이 일생 일대에 겪었던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서로들
털어놓았다. 처연하고도 숙연한 분위기가 동굴의 내부에 가득 드리워졌다. 노인은
맑고도 우렁찬 소리로 서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들 둘은 이제 유선문(流仙門)의 제12대 제자가 된 거야. 본문의
조사(祖師)이신 신청웅(申淸雄) 어른께서는 조선 중기의 문무가 백출한 기인이셨어.
그 분의 도(道)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다. 글자 그대로 무궁무진하여 도저히 필설로는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네. 자네들에게 물려 줄 것은 크게 말하면, 세 가지일세. 세
가지 중의 으뜸으로는 가히 독보적이랄 수 있는 심성 수련법이야. 조금 전에 내가
각자의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말하게 한 것은 말일세. 각자가 존중하는 정서와 가치의
척도가 어떠한 유형인가를 파악한 다음에 말이야. 그것을 토대로 심성 수련의 지도
지침으로 삼고자 한 것일세, 알겠는가 ? 다음으로는 공전 절후의 절대 무학(武學)이
둘째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말이다. 거의 계승이 단절된 음률을 이용한 기공 수련일세.
일 주일만 여유를 줄 테니까, 바깥 세상으로 나가서, 처리할 것은 처리하고 돌아와.
전수에 필요한 기간은 3개월일세. 이 기간 동안은 나와 함께 이 동굴에서 숙식을
함께 해야 하네. 전수의 장소로는 호젓한 산사(山寺)라든가 단독 주택이 있겠지만,
동굴을 택한 이유는 말일세. 동굴 전수가 본문의 전통적인 전수 방법이어서 그렇다네.
앞으로 자네들도 제자를 가르칠 때엔 반드시 전통을 지켜 주어야만 하네, 알겠는고
?
또한 이 번의 외출 기간 중에 자네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본국검(本國劍)이라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거네. 신라 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우리 민족 고유의 검술을
말함일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내려오는 피상적인 것 말고, 전승되지 못한
절기들이 있었는데 말일세. 상승의 경지에까지 소화할 수 있는 무인들이 없었던 것이
단절의 커다란 원인이었어. 또 하나는 검술을 기록한 서책의 유실이 또 다른 원인이었지.
놀랍게도 근래에 상족암의 쌍발이란 해식 동굴에서 미약한 단서를 얻었네. 마군은
즉시 경기의 제부도로 건너가 제비 바위란 무인도를 수색해 봐 주게. 이게 바로 제비
바위를 그린 지도일세. 이것을 판독하는 데에만, 2년의 세월이 흘렀네. 운이 좋으면
어떤 소득을 얻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백군은 삼척의 환선굴(幻仙窟)을 다녀오기
바라네. 최근에 확보한 자료에 의하면, 동굴 앞 선녀폭포의 바위 틈새에 뭔가가 있다는구먼.
그게 어쩌면 기공 수련에 대한 희귀한 탄주법(彈奏法)이 수록된 비록(秘錄)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니까 최선을 다해, 단서를 찾아와 주길 바라네.
그리고, 나도 이 번에 아주 신비에 쌓인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려고 하네. 그럼,
내가 먼저 이 동굴을 떠날 테니까, 자네들도 반드시 기일까지 돌아오기 바라네. 자네들
모두의 건승(健勝)을 비네.
노인을 배웅한 뒤에, 여인과 나는 동굴 바닥에 앉아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인은 나를 향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사형제(師兄弟)가 되었군요. 저를 지금부터
'사제(師弟)'라고 불러 줄래요 ?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거리며 대답했다. 아리따운
여인을 사제로 두게 되어 기뻐. 저도 미남 사형을 두게 되어 무척 기쁘네요. 앞으로
우리 좋은 동문 형제가 되자구요. 잠시 후에, 여인과 나는 행장을 수습하여, 동굴을
떠나 버스 정류장으로 내달았다. 사천시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여인과 헤어질 무렵이었다.
여인은 가벼운 미소와 더불어 뽀얀 손을 내밀었다. 여인과 악수를 나누고 여인을
실은 버스를 떠나보낸 뒤에,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전신이 나른해지며
눈이 저절로 감겨져 왔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의식 속으로 새로운 과제인 제비 바위에
대한 상념이 끓어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