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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회
              달그림자
                                                                                                             손 정 모

                                                      1. 아침 바다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새벽 무렵이었다. 해변 어디에도 불빛은 없었다. 별빛과 어우러진 달빛만이 해변 가득히 쏟아지고 있었다. 퇴적암층(堆積岩層)들의 단애(斷崖)들 아래로 습기를 머금은 해변길이 하얗게 드러누워 있었다. 그 길의 중간 굽이쯤에서였다. 나는 하염없이 물수제비를 뜨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약돌이 수면을 지치면서 지나칠 적마다 은빛 물보라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마음이 공허하여, 점차 돌팔매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3년 전의 11월 이후로, 해변에만 서면 곧잘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설사 목하의 상족암(床足岩) 해변과 석모도의 해변 정경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점차 물안개가 해변 자욱히 밀려들었지만, 나의 돌팔매질은 더욱 빈도가 잦아졌다. 해수면이 하얗게 갈라질 적마다, 내겐 과거의 시린 여운이 나의 가슴을 죄어 왔다. 그리하여, 나는 절벽에 기댄 채 3년 전 11월의 겨울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11월의 마지막 주의 월요일 오전 9시 무렵이었다. 3일간의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동호인 조직에서 잠시 일을 볼 때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였다. 초겨울의 바람이 연신 빛살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치켜 뜨면서, 폐쇄 회로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모컨을 누름에 따라, 순서대로 접수실, 탈의실 및 분장실 등의 영상이 현란하게 펼쳐졌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이다. 고성능의 감시용 몰래 카메라가 전송하는 고화질의, 여인들의 나체상들이 모니터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뽀얀 여인들의 속살에 눈길이 이르자 다시금 머리가 아파 오며, 상념에 젖어 들었다. 지난밤이었던가 아니면 어쩜 새벽 무렵이었을 터였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는 종내 정신을 온전하게 추스를 수가 없었다. 혼몽(昏 )한 상태에 젖어, 그저 손길 닿는 대로 여인들의 알몸을 애무해 대고 있었다. 여인들 ? 그래, 분명 '여인'이 아닌 세검정의 두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지난밤 내내 나와 엉겨 붙은 채, 밤을 하얗게 지샜다. 내게 지난밤처럼 그렇게 감미롭고 황홀했던 순간들이 있었던가 ?

  리모컨으로 일시에 고정된 화면은 접수실의 장면이었다. 스물 안팎의 앳된 처녀들 셋이 줄을 지어 서류를 내밀고 있었다. 아마도 서류는 채용 신체 검사서와 재학 증명서일 터였다. 왜냐하면, '상반기 누드 모델 특채(여대생 우대)'라는 광고가 2주 연속으로 나갔었기 때문이리라. 잠시 후에 여인들은 커텐을 젖히며 탈의실로 들어섰다. 어느새 나의 집게손가락은 리모컨을 눌러, 탈의실의 장면을 펼쳐 놓고 있었다. 여인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대형 유리 거울 앞에 서더니 훌훌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새 테이프를 꺼내 여인들의 나체상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핏발 선 바람이었다. 슬며시 다가왔다가는 마구 발길질을 해대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바람 줄기였다. 여차하면 창틀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을 듯한 위세이기도 했다. 같은 바람이어도, 이처럼 냉혹한 바람결은 도대체 구미에 맞지가 않았다. 날이 선 바람결을 대할 때면, 내가 신입생이었던 시절의 선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해 10월의 음력 보름날이었다. 이제 막 야월회(夜月會)가 끝나고 일행들이 모두 하산해 버린 자정 무렵이었다. 관악산의 오솔길엔 선옥과 나만이 남아,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없이 자애로와 무엇이라도 포용해 줄 것만 같은 달빛이었다. 나보다 1살이 많은 선옥은 사회학과 2학년의 여학생이었다. 누가 봐도 선옥은 깔끔한 미모의 발랄한 여인이었다. 신림동의 같은 캠퍼스를 오갔어도, 선옥과의 만남은 그 날 밤이 네 번째였을 뿐. 그것마저도 개인적인 만남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잠시 후에 여인들은 흰 가운 한 장만을 걸친 차림새로 분장실로 들어섰다. 어느새 모니터의 화면은 분장실을 향해 열려 있었다. 두 여인은 비치된 면도날로 거웃의 일부를 예쁜 모양새로 밀고 있었다. 다른 한 여인은 머리에 젤을 살짝 발라, 빗질로 머리 모양을 다듬고 있었다. 대략 5분쯤 지난 뒤에 여인들은 일제히 가운 자락을 펄럭이며, 조명실로 들어섰다. 모니터의 화면은 여인들을 좇아, 조명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명실에는 대학원생들인 형진이와 찬수가 조명등(照明燈)을 비추며, 여인들이 알몸으로 무대에 서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알몸으로 무대에 오르자마자,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심사실의 커텐 자락이 젖혀지며,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은 세 여인들이 들어섰다. 나는 접수실에서 갖다 놓은 서류의 사진과 여인들의 얼굴이 같은지를 면밀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확인을 마치고는 접수 서류에 여인들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 적고는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 영진 프로덕션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오늘의 촬영 자료를 분석해서, 다음 주말까지는 개인별로 통지해 드리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들 가십시오."
여인들은 일제히 교태 어린 미소를 던지며, 출입문을 통해 빠져 나갔다.

  야월회(夜月會)에서, 내원(內圓)의 선옥과 외원(外圓)의 내가 마주선 채 나눈 3분 가량의 대화에서였다. 선옥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행사 끝난 뒤에, 여기에 좀 남아 줄래요 ? 그리하여, 선옥과 나는 자정 무렵의 관악산에 머물게 된 터였다. 밤이라서인지 솔잎에서 내풍기는 솔향기가 한결 그윽하게 느껴졌다. '쏴아쏴아'하고 밀려드는 솔바람 소리에 태고의 정밀(靜謐)이 깨어나 빛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종철씨, 혹시 사귀시는 애인이 있으신가요 ? "
  "아뇨, 아직까지는요."
  "그럼, 종철씨의 눈엔 제가 어떻게 보이세요 ?"
  "한 마디로, 온 몸으로 사귀고 싶은 분이세요."
  "그럼, 우리 이제부터 애인이 되면 어떨까요 ? "
  차디찬 달빛, 짙푸른 바람결. 어느새 선옥과 나는 서로의 손을 마주잡은 채, 짙푸른 달빛에 젖어들고 있었다. 가슴속의 섬세한 떨림마저도 맞잡은 손길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선옥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서서히 가져 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온 몸이 전율할 듯한 미묘한 감촉이 입술로부터 전해져 왔다. 마치 '쩡'하고 얼음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뜩한 현기증마저 일어, 순간적으로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떨지 마. 포근히 안아 줄게. 비음을 실은 선옥의 목소리가 나의 귓전에 은빛 파도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푸른 달빛 아래, 산야를 적시는 솔바람 소리만 쉬지 않고 귓전에 부서지고 있었다. 포옹하느라고 두어 번 뒤척거리는 사이에, 선옥의 상의는 뱃살을 하얗게 드러내고 있었다. 금세라도 맑은 바람이 일 듯한 해맑은 피부였다. 나의 손은 선옥의 살갗을 더듬어 오르다가 어느새 브래지어를 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선옥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거리더니, 급기야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가는 신음을 토했다. 무수한 얼음장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사방에서 솔바람이 드세게 불어 댔다. 나는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며, 덩그렇게 돌출된 선옥의 젖가슴에 얼굴을 가져 갔다. 솔방울 소리인지 별똥이 떨어지는 소리인지 사방에서 뭔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날 밤 나는 두 시간 가량을 선옥의 젖가슴만을 애무해 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선은 내가 소중히 지켜 주고 싶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여인들의 뽀얀 속살만 보면 선옥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몇 개월이 흐른 뒤였다. 천지가 백설에 뒤덮여 얼어붙던 겨울이었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노송(老松) 아래의 너럭바위 위에서였다. 애무를 받느라고 발가벗은 상반신을 내게 기댄 채, 선옥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헤어져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며, 선옥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부쩍 악화된 선옥의 간경화를 치료하느라고 선옥의 부모가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 간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다음 주쯤이면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기약 없는 이별이라, 어쩜 영원한 작별이 될지도 모를 이별이었다. 선옥과 나는 서로의 몸을 부둥켜 안은 채, 백설 속의 화석으로 남겨지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갔건만, 끝내는 만리 타국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산화되고 말았다. 예감한 바였지만, 한동안 가슴이 송두리째 찢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차디차게 얼어붙은 내면으로부터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지금까지 이다지도 섧고 시린 아픔이 있었던가 ? 아, 잊기로 하자. 두고두고 가슴속이 쓰라리고 애달플지라도 말이다. 나는 점차 선옥을 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선옥은 나의 뇌리에 사무치게 그리운 여인으로 남아 있었다.

  닫혔던 출입문이 금세 열리더니, 방금 나갔던 단발형의 여인이 헐떡거리며 내게 다가섰다. 의아한 눈초리로 여인을 바라보는 찰나였다. 여인은 나의 얼굴에 기습적인 키스를 해대며, 비음 섞인 목소리로 교태를 부렸다.
  "아저씨이 ! 나 좀 꼭 붙여 주셔야 해요. 원한다면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말이예요, 아시겠죠 ? "
  여인을 내보내고는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부류의 여인들이 어디 한 둘이었어야 말이지. 여인들이 떠나간 뒤 잠시 정적이 밀려 왔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며,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러자, 닷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스물 다섯인, 숙대 생물과 조교인 지연이 정색을 하며, 세검정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었다. 다음 날이면 석모도의 해양 생물군을 조사하러 갈 거라며, 출발에 앞서, 나로부터 위안받고 싶다는 거였다. 스물 여덟의 미혼으로, 해양과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는 나에겐 말이다. 확실히 지연은 미래의 훌륭한 결혼 상대자였다. 하지만, 사귀어 온 지 삼 년째였으나, 나에겐 버겁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버겁다는 느낌은 내 마음의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요소였다. 나에겐 어떤 유형의 인간이든 조목조목 사리를 따지려 드는 형은 딱 질색이었다. 다른 것은 다 좋은 데 말이다. 불행스럽게도 지연의 분별력 있는 태도란 것이 때때로 나의 가슴을 짓눌러 놓곤 했다. 젠장맞을 일 같으니라구. 어디 이 세상의 일이 논리대로만 돌아가느냐 말이다. 처음에는 대수로와 보이지 않던 일들이 날이 갈수록 나의 가슴에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의 견해로는 말이다. 못 생겨도 좋으니까, 제발 좀 따지려 들지 않는 여인과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달포 가량을 고뇌에 휩싸인 채 생각하다가, 나는 지연을 놓아 보내기로 했다. 그 날이 바로 닷새 전이었다. 설사 지연이 나를 지극히 필요한 사람이라고 매달렸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삶이란 마음의 평온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세검정의 불꽃카페에서 그녀와 찻잔을 나누며 고별을 선언했다. 지연은 나의 말을 듣고는 파랗게 떨며, 왜 자신이 싫은지를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숨을 내쉬며 단숨에 말했다. 만약에 말하다가 제동이 걸리면, 나의 의지를 관철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너의 따지려 드는 태도 그게 아무래도 부담스럽게 느껴져. 따진다는 것은 나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측면인 것만 같아, 영 마음이 편치를 않아.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고 싶지 않거든. 너는 잘 모를 테지만, 내겐 너의 따지려는 태도가 노이로제가 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구."

  지연은 한결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종철아,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 내일이면 서해 바다로 잠수를 떠나는 나를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이게 무슨 소리야 ? 내가 너에게 부담을 준 게 뭐냐구 ?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 너 혹시 3년간이나 지내면서, 내가 너에게 몸을 열어 주지 않아서 그래, 응 ? 만약에 그 문제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벗어 줄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 ? 왜 오늘 밤엔 알아듣질 못하는 소리만 자꾸 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 ? 너 혹시 다른 여자 생긴 건 아니니 ? 그 때문이라면, 나 절대로 양보 못해, 알아 ? "
  나는 잠자코 지연을 향해, 작별의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연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그녀의 눈에는 광기마저 실린 듯했다. 마침내 그녀는 격분을 참지 못해, 나의 뺨을 후려갈기며 떠났다. 떠나면서도 그녀는 눈물 방울을 추스르지 못해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모순스럽게도 그녀가 떠나자마자 나의 가슴은 서서히 공허해졌다. 그 후로 미련과 번민에 휩싸인 채 나는 꼬박 나흘간을 멍하니 보냈다.

  그러던 지난밤이었다. 나는 지연으로부터 쌓였던 울화를 풀 겸, 저녁을 먹은 뒤에 세검정의 북악 나이트에 들렀다. 나는 나의 행동이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니었던가를 계속 생각하며 술잔을 들었다. 나이트 클럽의 조명이 번쩍거리는 먼 발치쯤에서였다.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던 40대 초반의 두 여인이 내게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이 봐요, 총각. 너무 혼자서 그렇게 마셔 대면 무섭잖아 ? 괴로운 일이 있으면 우리가 부드럽게 풀어 줄게, 자 일어나 봐, 응 ?"
  보기보다는 팔 힘이 억센 여인들이었다. 두 여인들에게 떼밀려 홀의 중앙에 섰지만, 이미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흐느적거리다간 또 좌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그러다간 다시 떼밀려 춤을 추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어머나, 아저씨. 무척 피곤하신가 봐."
  눈을 번쩍 뜨니, 눈 앞에 여인들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서류와 여인들의 얼굴을 대조하고는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여인들은 아양을 떨며,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종로 2가를 오가는 차량들과 인파들로 항시 번잡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빌딩들의 숲 위로 파란 하늘이 그윽한 깊이로 드리워져 있었다. 아, 지겨워. 나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는 다시 넣고 말았다. 여인들을 상대할 때에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고, 도(都)회장이 만날 때마다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낮 12시 10분 전이었다. 이제 10분 후면 셔터를 내려야 했다. 회원들을 위해 오후 1시 정각에는 시청 광장으로 관악 관광의 버스가 오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마지막 10분을 위해 맑은 정신을 일깨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랬음에도 말이다. 꼿꼿이 앉은 채로 졸며, 의식은 어느덧 지난밤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두 여인은 날아 갈 듯이 단정하게 미니스커트를 차려 입고 있었다. 대화를 통해, 흰색의 미니는 정혜였고, 자주색의 미니는 미숙이었음을 알았다. 겉보기로는 날씬한 여인들이었지만, 팔의 힘이 어지간히도 드센 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좌석과 홀 사이를 정신 없이 오가곤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모를 일은 언제 여인들과 함께 여관에 투숙했었느냐는 점이었다. 새벽 무렵이었다. 심한 갈증으로 머리맡을 더듬으니, 누군가 물컵을 안겨 주었기에 정신 없이 마셨었다. 추측컨대, 그 당시의 물컵에는 여인들이 탄 환각제가 녹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상스럽게도 물을 마시자마자 가슴이 불에 덴 듯 펄펄 끓어 올랐다. 마구 다리를 내뻗으며 돌아눕자마자, 놀랍게도 탄력 있는 여인의 살결이 느껴져 왔다. 허나, 그러한 느낌도 잠시뿐이었다. 눈엔 허깨비가 비친 듯, 나는 여인들의 살결을 마구 핥으며 애무해 댔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 왔다.
  "종철아, 종철아 ! 물에 휩쓸리면 안 돼. 제발 정신 좀 차려."
  의식의 세계가 웅웅거리며,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때 맞춰 황톳물이 어디에서부터인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선옥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선옥의 입술을 찾아 나의 입술을 쫑긋거리며 밀고 다녔다. 이 때, 가물거리는 의식의 뒷전으로 키들거리는 여인들의 대화가 여진처럼 울려 퍼졌다.
  "얘, 미숙아. 이 솜털 좀 보라구. 환각제를 조금 먹였더니, 마치 산삼이라도 먹은 양 불 방망이처럼 힘을 쓰네. 지금 삽입이 안 되면 안 되니까, 좀 도와 줘, 응 ?"
  평생 해 보지 못했던 교접을 지난밤을 기해, 얼마나 해 댔던가 ? 생각할수록 놀라웠다. 급기야 새벽녘에는 코피까지 쏟으며 널브러져 눕고 말았지만 말이다. 여인들의 품은 아늑하고도 따사로운 것이 오뉴월의 밀밭을 스쳐 가는 바람결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 7시 무렵에야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엉덩이를 떼려고 했지만,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바로 이 때였다. 나의 전신으로 오싹 찬 기운이 배어 들면서,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내가 비몽사몽간에 애타게 더듬어 찾았던 선옥의 입술이 여인들의 음순이었단 말인가 ? 나는 갑작스럽게 쓰레기통을 갖다 놓은 채 '툇툇'거리며 침을 내뱉았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여인들이 에이즈 환자들이었다면, 콘돔도 못 썼던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일 터였다. 약국의 문이 열릴 때까지를 못 참아, 안절부절못하여 몸이 마구 떨렸다. 삼일 빌딩을 오르기 직전에 들른 약국에서였다. 나는 몹시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약사에게 말했다.
  "한 삼 일쯤 됐거든요. 발바닥이 못에 찔려서 고름이 많이 나와요. 먹는 약 있으면 좀 주시겠어요 ?"
  약사는 먹는 약도 중요하지만 상처의 치료도 잘 해야 한다며 약을 건네주었다. 받고 보니, 샤프라닉스 II 라고 적힌 항생제 8알이었고, 이틀 치라고 적혀 있었다. 빈 속에 항생제 두 알을 털어 넣고는 삼일빌딩을 올라 화장실에 들렀다. 오줌을 누니, 성기의 말단부가 다소 따끔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영 죽을 맛이었지만, 태연히 505호실에 들렀다. 도착하니, 준호가 막 셔터를 올리는 중이었고, 잠시 후에 형진이와 찬수도 들어섰었다. 심사실에 있으면서도 자꾸만 성기에 신경이 쓰여, 수시로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그 때마다 요도의 끝 부분에서 따끔거리는 듯한 자각 증상이 느껴져 오는 듯했다.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나쁜 년들 같으니라구. 대관절 나를 뭘로 본 거야 ? 아무리 영계의 맛을 못 봐 걸신들린 여편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최소한 상대방의 물건에 콘돔 정도는 씌워 주어야 할 게 아니냔 말이다. 에이, 버르장머리 없는 여편네들 같으니라구. 생각할수록 지난밤에 똥 바가지를 뒤집어 쓴 기분이어서, 영 죽을 맛이었다. 평소에라도 전혀 콘돔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505호실의 셔터를 내리고 일행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벽면에 '홍역을 앓는 국내의 농산물'이라는 제목의 쪽지문이 부착되어 있었다. 홍역이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그만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 때 준호가 급히 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종철형, 어디 아프세요 ?"
  "아니야, 아니라구."
  나는 황급히 부인하면서도,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절망했다. 아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 설사 콘돔이 있었어도 에이즈를 피할 수는 없는 운명이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는 선옥의 얼굴을 찾는답시고 나의 입술이 밤새 더듬은 것은 …… 또 다시 침이 괴어 오르며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설사 여편네들의 음순이었다고 하더라도 입술처럼 한없이 부드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에 음순 주위에 바이러스가 창궐했었다면, 나는 분명 종 친 인생이었으리라. 종 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의 이름자까지 마음에 걸렸다. 하고많은 이름들 중에 '종철'이가 뭐냔 말이다. 언뜻 뇌리에 못난 놈이 조상 탓한다는 속담이 떠올라 얼굴이 머쓱해졌다. 순간이나마 감히 아버지를 모독했다는 느낌이 들어, 옷깃을 여미자마자 눈물이 빠져 나왔다. 생각할수록 세검정의 여인들이 밉살스러웠다. 이후, 한 번만 더 만난다면 …… 순간적으로 차마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생각까지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음식점을 찾으러 가는 동안 줄곧 준호가 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준호의 친밀한 몸짓마저도 내게는 짜증으로 되돌려지고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지껄였다. 야 임마, 어디를 두드리고 야단이야 ? 정작 두드릴 곳은 나의 물건과 입술인데 말이야. 알기나 하냐구 ? 나는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핑계 거리만 있다면 마냥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슴 답답한 한편으론 지연에 대한 그리움이 슬며시 피어오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나는 곧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 세상의 여자가 없더라도 도저히 따지려 드는 사람은 질색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이 지나서야 관광 버스는 시청 앞 광장을 출발했다. 흘낏 차 안을 둘러보니, 회원과 모델들의 수가 서른 대여섯에 달했다. 나는 복잡한 심사로 친다면야 당장 하차해 버리고 싶었지만, 정회원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잠은 오지 않고 복잡한 상념만 짙게 끓어 올랐다.

  행선지가 관악산이어선지 문득 두 달 전에 치러진 야월회의 행사가 떠올랐다. 야월회(夜月會)란 대학간의 거대한 연합 써클(circle)의 일종이었고, 밀교(密敎) 의식을 곁들인 동호인 모임이었다. 게다가 졸업한 동문들까지도 규합하는 거대한 써클이었다. 야월회가 추앙하는 인물은 월궁(月宮)의 항아였고, 음력 보름에 맞춰 모임을 갖곤 했다. 언제나 야월회가 열리는 시각은 밤 10시였었고, 주로 서울 근교의 산봉우리에서 행사가 치러졌다.
  두 달 전의 그 날도 달빛이 눈부시게 나부끼던 밤이었다. 안양 쪽으로 돌출된, 관악산의 능선 지대에 해당되는 부위였다. 29살의 대학원생인 윤(尹)회장은 돗자리를 펼쳐 제물을 진열하고는 하늘을 향해 향을 피워 올렸다. 향 연기가 시린 달빛에 실려, 남실거리며 푸른 하늘로 날아 올랐다. 장내는 한껏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때부터서였다. 회원들은 하얀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략 5분쯤이 경과되었을까 ? 모여 든 회원들은 일제히 제단을 향해 원형으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또 다시 5분쯤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회원들은 일제히 일어서더니, 다시 세 번의 큰절을 올렸다. 죽비 소리를 신호로 자세를 바로잡으니, 제단 주위로는 두 개의 동심원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원(內圓)에는 서른 명의 여인들이 벌려 섰고, 외원(外圓)에는 같은 수의 사내들이 벌려 섰었다. 야월회의 규정에 따라, 언제나 참여하는 남녀의 인원은 같은 수가 되어야만 했다. 회원들은 하나같이 눈부실 정도의 하얀 가운으로 차려 입고 있었다. 이 가운이야말로 야월회 정회원의 상징이었으며, 가운의 등판에는 '夜月'이란 흑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장내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숙연함에 젖어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일곱 번의 죽비 소리가 시린 달밤의 정적을 갈라 놓았다. 이 때부터 서서히 내원 주위로 외원이 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외원의 사내들과 내원의 여인들이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면서부터 남녀는 간혹 손을 잡기도 했고, 그윽한 눈빛으로 시선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녀는 자연스레 상대방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쌓였던 속내를 털어 놓기도 했다. 2 ∼ 3분의 시간마다 외원의 사내들은 짝을 바꿔 이동했다. 대화는 속삭이는 수준에서 진행되었고,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포근해지고 감미로워졌다. 점점 농밀(濃密)한 분위기에 젖어, 한없이 달아오르는 달밤의 정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탈선이라도 일어날 듯한 정경이었다. 하지만, 야월회의 절대 금기 중의 하나가 문란한 행위였다. 점차 대화는 갈수록 신선해졌고, 산의 능선을 뒤덮는 맑은 속삭임 소리도 더욱 고조되었다. 회원들의 속삭임 소리가 높아질수록 과거 신입생 시절의 선옥이가 애틋한 그리움으로 떠오르곤 했다.

  "종철형, 오늘처럼 화창한 날에 웬 낮잠이세요 ? 그러지 말고 나랑 얘기나 좀 하자구요. "
  잠에서 막 깨어난 얼굴로 나는 곁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여인은 2학년에 재학중인 대학생 모델인 혜진이었다. 게슴츠레해지려는 눈을 억지로 떠, 혜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혜진과의 만남은 두 번째였다. 고3 때 위암으로 어머니를 잃고서부터, 그녀에게 가정은 더 이상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선택한 것이 누드 사진 모델이었고, 때때로 육체적 교접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에 내가 혜진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눈매엔 고뇌의 빛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왠지 보아서는 안 될, 처절한 상실감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묘하게도 혜진이 나를 본 첫 인상 역시 그랬었노라고 그녀가 고백한 적이 있었다. 혜진의 느낌대로라면, 혜진과 나는 뭔가 약간의 공통점이 있었을 터였다.
  버스에서 내린 회원들이 관악산의 정상 부근으로 흩어져 간 시점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하늘은 쾌청했고, 솔숲을 스쳐 흐르는 바람결은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회원과 모델들의 분배가 시작되자, 혜진은 나의 모델이 되겠다며 따라 나섰다.
  혜진은 알몸을 드러내자마자 익숙한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앞에 섰다. 바위를 보면 바위 위에 올라섰고, 고목이 있으면 고목 위에 올라섰다. 젊고 앳된 피부여서인지 혜진의 어떠한 자세에서도 요염하고도 선정적인 분위기가 넘쳐 흘렀다. 하늘을 배경으로 고목 등걸 위에 올라선 혜진의 자태는 하강하는 선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자세가 너무나도 우아스러웠기에, 나는 사진기를 내린 채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사진기를 내린 채 멍한 표정을 짓자마자, 혜진은 머리를 풀었다. 고목 등걸 위에서 학춤을 추듯 창공을 향해 한껏 자세를 부풀렸다. 참으로 예술적인 감각이 빼어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며, 그녀에게 강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하여, 고목의 가지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는 혜진을 받쳐 안고는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 것일까 ? 혜진은 그럴 수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머리카락을 나풀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혜진의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오며, 가슴이 떨렸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정지된 채, 화석이 되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움이란 것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나 싶자, 한층 여인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대략 십여 미터를 말없이 걸어간 뒤, 나는 혜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잔디 위에 눕힌 뒤, 그녀의 옷을 가져다 주었다. 혜진이 옷을 다 입을 때까지를 기다린 뒤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풋풋한 풀꽃의 향기가 은은히 서려 있는 잔디밭 위로 걸어갔다. 이내 그녀와 나는 하늘을 향해 잔디 위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담청색의 맑은 하늘 위로 한 떼의 새털구름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나른한 느낌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혜진이 나를 향해 돌아누우면서 내게 말했다. 종철형,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왜 우린 이 시각에 여기에 누워 있어야 돼 ? 관념이 뭔지, 형은 분명 날 좋아하는 눈치이면서도 말이야. 내가 누드 모델이라고 해서, 나를 갖겠다는 말 한 마디 없으니 …… 설사 형은 신념이 뚜렷해서 외적인 미와 성욕을 구별한다고 치자 말이야. 그런데, 난 바보같이 뭐야 ? 난 내 주제도 모른 채, 형이 나의 몸을 열어 주겠거니 믿곤 했었어. 그러니, 더욱 속이 터질 수밖에는. 분명한 건 말이야. 이 우주에 형과 나는 다시는 똑 같은 모습으로 환생되지 않는다는 점이야. 그런데, 왜 우리는 안타깝게도 관념의 사슬에 묶여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걸까 말이다. 그래도 나는 형이 나를 안아 들고 올 때까지만 해도 기대를 했었어. 섹스도 안 할 거면서 뭐하러 날 여기까지 안고 왔느냐구 ? 내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야. 형은 어디까지나 여체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는 고고한 사람이고, 나는 누드 모델일 뿐이다, 이거지 ? 정말 뺑 돌아 버리겠네. 형은 모델 여인들의 육체적 아름다움은 탐닉하면서도, 모델 자체는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이거지 ?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 뭐냐구 ?
  혜진은 신세대답게 오빠라는 용어보다는 '형'이라는 용어를 즐겨 썼다. 하지만, 내겐 혜진의 말소리조차도 점차 따지려는 투로 들리면서부터 슬며시 짜증스러워졌다. 나는 점차 혜진의 말소리를 귓전으로 흘려 보내며 눈을 감았다. 세검정의 여인들에 대한 증오도 사라지기 전에, 혜진의 말은 또다시 가슴을 황량하게 만들었다. 서서히 지난밤에 과로했던 후유증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자꾸만 눈이 감기려고 했다. 극도의 수면 부족이라, 잠들면 도저히 못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중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발가숭이 상태의 혜진을 밀어내며, 다급하게 말했다. 에이즈 ! 에이즈란 말이다 ! 순간적으로 혜진의 얼굴은 공포의 빛으로 핼쑥하게 질렸다. 그러더니, 더듬더듬 그녀의 입으로부터 말이 새어 나왔다. 아아니, 그럼 …… 종철형이 …… 에이즈 환자였단 말이야 ? 정말이냐구 ? 내게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서였다. 급기야 혜진은 발작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예 나의 대답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아이고, 엄마 ! 나 어떻게 해 ? 야, 이 자식아 !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어 ? 아무 데나 콱 물어뜯어 버릴까보다."
  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세검정의 여인들을 떠올리자, 금세 혜진의 광기가 충분히 이해될 지경이었다. 나는 발작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나의 몸이 에이즈일 확률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내게 달려들더니 나의 두 뺨을 '철썩'거리며 갈겨 대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아 주었다. 연이어 혜진의 광기 어린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야, 이 새끼야 ! 네 몸 하나만 망가졌으면 됐지, 은근히 남을 꼬드기긴 왜 꼬드겨 ? 흐흐흑 ! 아이구, 이제 난 영락없이 죽었네. 개좆 한 번 잘못 건드려, 내 청춘 다 날아가네. 우와, 나 정말 뺑 돌아 버리겠네, 씨팔 ! "
  나는 정말 에이즈 환자로 최종 판정을 받은 사람인 양, 허공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혜진은 허둥대며 옷을 챙겨 입고는 바람처럼 잽싸게 산을 내려가 버렸다. 나는 그제야 나의 꼬락서니를 훑어보았다. 혜진의 힘으로 어떻게 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잠에 취한 나의 하반신을 발가벗겨 놓았었다. 뿐만 아니라, 잠에 취한 나의 몸을 덮씌워 교접까지도 시도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발작으로 미루어 보건대, 나의 성기가 그녀의 몸에 접촉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도 이래저래 어안이 벙벙하여,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옷을 추스려 입고는 잠자코 산을 내려왔다. 아무래도 연이틀간의 일진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신림동의 나의 전셋집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 서늘한 바람에 으스스 깨어나 일어나 보니, 오후 7시 무렵이었다. 내가 취미로 한국화를 배우고 있는 종남 예술학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학원은 나의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었다. 미혼 여성인 사십대 초반의 원장인 주옥란(朱玉蘭)은 녹차를 마시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미소지었다. 내가 옥란을 따라 먹을 간 지도 어느새 1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초심자인 나의 눈에도 옥란의 필력은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옥란은 대한민국 미술대전의 한국화 부분의 특선 작가이자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나는 옥란의 산수도를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곤 한다. 옥란의 산수도엔 생동하는 기운이 화면 가득히 서려 있었다. 골짜기의 물은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듯했고, 바람은 금세라도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화선지에 이렇게 생동하는 기운을 실을 수 있는 옥란은 나에게는 언제나 경이로운 대상이었다. 지금 나는 옥란의 작품인 '설악비경(雪岳秘境)'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고 있다. 화폭의 골짜기가 만나는 곳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며 바람이 화면 가득히 소용돌이친다. 어떠한 잡념도 단숨에 불식시켜 버릴 듯한 기백이 잔뜩 서려 있다. 한 동안 그림을 앞에 두고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종철씨 !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붓을 드는 것은 더 중요하거든요. 눈빛을 보니, 오늘은 뭔가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요. 자, 이 붓으로 한 번 자유롭게 그려 보세요."
  옥란은 붓을 가져와 내게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림을 그리러 온 게 아니에요. 오늘은 그저 원장님의 작품에 잠겨 제 자신을 반추해 보고 싶을 따름이라구요."
  이 때부터 나는 석상이나 된 듯 넋을 잃은 채,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다. 한동안 무아지경에 휩싸여 그림의 농무(濃霧) 속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전신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뭔가 뻐근한 것이 명치를 훑고 지나갔다. 무질서 속의 질서의 전형을 꿰뚫어 본 듯한 느낌이었다. 혼란한 머리 속이 개운해지며, 깨달음에 대한 희열감이 전신에 끓어 올랐다. 아, 참으로 나의 관점이 편협하기 짝이 없었나 보다. 따지려는 지연을 싫어하는 나의 관점은 얼마나 꽉 막힌 사고였는가 말이다. 그림 속의 생동하는 기운이 마침내 꽉 막힌 나의 사고를 일깨워 주었던 거였다. 이제라도 지연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의 품으로 맞아들이리라 결의를 굳혔다. 나는 몽환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환희에 들떠, 서둘러 학원을 떠나왔다.

  집에 도착해 보니, 전보 한 통이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지연의 죽음을 알리는 조전(弔電)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 창졸간에 설움이 끓어 오르며, 나는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안 돼 !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 어째 이런 일이 ?'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석모도로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했다. 전보의 발신지는 강화군 석모도 상리의 상주산 북동 해변이었다. 수중 생물군의 생태 조사를 위해, 나흘 전에 지연이가 석모도로 간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의 대학원 동료들 셋과 함께 네 번째의 잠수를 실시하다가 변을 당한 거였다. 바다 밑에 버려진 낚싯줄에 휘감겨 당한 변고였었다. 서둘러 현장에 도착해 보니, 지연은 이미 영안실로 옮겨지고 없었다. 현장에는 그녀의 동료들만 남아서, 슬픈 눈빛으로 해안선을 굽어보고 있었다. 지연은 미국의 언니 말고는 인척이 없는 몸이라서, 사후 수습을 내가 맡기로 했다.
  
  순식간에 이틀이 지났다.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지연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은 채, 석모도의 북동 해변에 섰다.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자, 문득 나의 가슴에 지연에 대한 그리움이 끓어 올랐다. 그녀가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줄이야 ? 그녀가 창졸간에 이승을 하직했듯, 나 역시도 내일의 운명을 단언할 수 없잖은가 말이다.
  나는 지연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는 갯바위 위에 앉아 유골함을 풀었다. 하얀 사기 항아리의 뚜껑을 열자마자 곱게 빻아진 유분(釉粉)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해변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다에는 섬돌나루를 지나 교동도 쪽으로 달리는 몇몇 어선들의 엔진음만이 할딱거릴 뿐. 사위는 온통 죽음 같은 적막 속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서슬 퍼런 울음을 삼키며, 드러누운 바다를 향해 서서히 유분을 뿌리기 시작했다. 움켜쥔 주먹 속에서 유분이 흩날려 갈 때마다 나는 청순한 모습의 지연을 떠올렸다.
  3년 전의 첫 만남에서였다. 첫눈에 지연은 하얀 원피스 차림의, 눈빛이 유난히도 맑고 깔끔한 맵시의 여인이었다.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내 마음은 격렬하게 떨렸다. 이전에는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떨림이었다. 서로들 참고문헌을 찾느라고 부지런히 서고를 드나들다가 만나게 된 터였다.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매혹된 상태라,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떻게 원하시는 자료는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는 셈인가요 ? 흡족한 표정이시라,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머, 제 표정이 그랬나요 ? 해외 논문들까지도 금방금방 비치가 되어, 아주 만족스러운데요."
  망설임이 없는 자세와 시원하고도 쾌활한 언변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나는 그 때서부터 서로를 향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작별을 선언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자, 나는 곧바로 심한 자책감에 휩싸였다. 언제부터였던지 전신의 혈관이 파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유분을 계속해서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잿가루는 허공으로 흩어져 뽀얀 안개처럼 수면에 내리꽂히곤 했다. 간헐적으로 통통거리는 발동선의 엔진음만이 숨막힐 듯한 바다의 정적을 깨뜨려 주곤 했었다. 담청색의 고운 하늘과 새파랗게 부서지는 아침 바다를 굽어보며, 나는 자책감에 휩싸여 울먹였다. 어쩜 이다지도 맑게 드리워진 하늘일 수 있을까 ? 이렇게 맑고 고운 서해의 경관을 지켜보며 나는 마지막 잿가루를 허공에다 흩뿌렸다. 마침내 사기로 만들어진 빈 항아리만이 절망적으로 내 앞에 남겨졌다. 나는 빈 항아리를 앞에 두고 숙연한 자세로 세 차례의 절을 올렸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지연의 혼백에 대한 마지막 고별 인사였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해변으로 내려서서 항아리마저 가만히 물에 가라앉혔다. 바다는 금세 소리 없이 항아리를 삼키고 있었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항아리가 막 물 속으로 잠겨 드는 순간이었다. 살려 달라고 한껏 손을 치켜 드는 지연의 환영이 잠시 시야에서 어룽거렸다. 어이구, 저런 ? 나는 낮은 신음을 토하며, 환영에서 깨어나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닷물에 손을 담근 채,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때 마침 두 마리의 갈매기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들릴 듯 말 듯한 끼루룩거리는 소리마저도 지연의 한 맺힌 울음으로 들렸다. 고통에 겨워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은 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또다시 콧등이 맵싸해져 오며,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러면서부터였다. 서해의 장중한 파도 소리가 파랗게 일어서며, 날선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돌연 세찬 바닷바람이 왈칵 가슴팍을 파고들면서, 나는 3년 전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4시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해수욕장과 흡사한 만(灣)을 이루는 상족암(床足岩)의 해변길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깎아지른 듯한 퇴적층의 절벽이 휘어지는 곳에, 쌍발(雙足)이라고 불리우는 해식(海蝕) 동굴이 눈앞을 막아섰다. 좁고 높게 형성된 동굴들이 몇 개씩이나 잇닿아, 커다란 반대편의 출구로 열려 있었다. 반대편의 출구에는 다시 널따란 반석과 더불어 확 트인 남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상족암의 동굴에서 나는 숙명적인 상봉을 해야만 할 터였다. '안개 노인'이라 !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만나고 싶었던 기인인가 ? 그리고, 행적이 너무나 신출귀몰하여 좀처럼 만날 수 없다고 알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안개 노인을 떠올리자마자 전신에 한기를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면서,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뒷짐을 쥔 채 공룡의 발자국을 따라 해변을 거닐었다. 중생대의 백악기에 절정기를 이루었던 공룡들이 남긴 화석들 위로 달빛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떼를 지어 이동한 공룡의 흔적과 좁은 보폭으로 미루어 본다면 말이다. 공룡들이 나른한 하오의 산책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한 공룡들의 발자국이 있는 해변에서. 나는 잠시 후에 안개 노인을 만나야만 했다. 나는 서서히 가슴이 달아오르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크게 두어 차례 한 후에,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해식 동굴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