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떠돌이
손 정 모
새된 금속성으로 울리는 강바람이 연사흘째 기승을 부린다. 찢긴 청바지로 엄습하는 추위로 입술마저 뒤틀릴 지경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격납고 내부를 둘러본다. 수선 장비가 어지럽게 뒤엉킨 채 널브러져 있다. 표류하는 짐승의 숨결 같은 적막감만 그윽이 드리워져 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터널 같기만한 공간이다. 부서진 비행기 날개의 편향 장치 부분에서다. 엉덩이에 핏방울을 뚝뚝 흘리며 쥐 한 마리가 떨고 있다. 아마도 어떤 사고로 뾰족한 금속이나 유리에 찢긴 듯하다. 쥐로부터 2뼘쯤의 거리에 조각난 거울 조각이 섬광을 내뿜는다. 깨어진 거울 조각의 일부에는 쥐의 핏방울이 묻어 있다. 한껏 어지러운 느낌이다. 끌려드는 빛살마저 현기증을 일으키며 나뒹굴고 있다.
거울 조각의 섬광에 시선이 머물자 며칠 전의 사고가 떠올랐다. 신호 대기 중의 4거리에서였다. 사방에서 안개가 엉켜들고 있었다. 교통 신호 주기는 짜증이 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려니까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몇 번씩이나 우측을 살핀 뒤에 좌측으로 핸들을 꺾었다. 핸들을 꺾어 교차로를 막 통과할 무렵이었다. 트렁크 부분이 좌측에서 달려오던 검정색 갤로퍼에 의해 크게 부딪혔다. 추돌 순간에 내 차의 친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피가 들끓는다. 내면의 소용돌이에 귀가 멀 지경이다. 정비용 공구 박스를 밀치며 몸을 떨다가 주저앉는다. 힘이 부쳐서가 아니다. 나이 스물일곱인데 어디 힘에서 야 밀리랴?
교차로 좌측 차로에서 진입하던 차량에 트렁크 부분을 받힌 거였다. 신호 위반 상태에서 일어난 사고였기에 모든 게 내 책임이었다. 친구인 종택과 그의 여자 친구인 선영은 입원한 상태다. 종택은 갈비뼈가 부러졌고, 선영은 골반뼈에 기다랗게 금이 갔다. 상대 차량이나 내 차의 수리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종택과 선영의 입원 치료비도 엄연한 나의 몫이었다. 작살나는 건 나의 보험이었다. 왜 일이 자꾸만 꼬였던지? 교통사고만이라면 그나마 숨통이 틜 거였다.
힘들게 해머 자루를 움켜쥐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우그러든 두랄루민 금속판을 반반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한적한 야외인데도 작업량만큼은 무더기로 몰려 있다. 민간 항공업체가 늘어나면서 격납고로 유입되는 비행기 몸체의 잔해도 만만찮다. 동료 작업원인 동수는 아직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점심때가 지나서야 나타날 것이리라. 주량이 약한데다가 나랑 새벽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해머가 금속판에 부딪칠 때마다 고막이 얼얼하게 울린다. 고막이 울리는 강도, 여기에 따라 기분이 뒤죽박죽이다. 금속판에서 섬광이 일기 시작한다. 평탄화 작업이 거의 완료되어 감을 알려준다.
두랄루민에서 자꾸만 섬광이 일면서부터였다. 3주 전 ‘은하주점(銀河酒店)’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몽둥이로 박살난 술병과 유리잔이 허공을 날았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로 고막이 찢길 듯했다. 조명 기구의 배선을 잘라낸 건 순전히 주먹 패거리인 인천파(仁川派)였다. 인천파의 보스인 창날. 그의 영향권 아래에서는 그 누구도 배겨나질 못했다. 나의 오른팔의 팔뚝이 유리병에 찢긴 것도 그 날이었다.
“아악! 아아악!”
미처 도망 못 간 주점 도우미들의 절규로 실내가 뒤흔들렸다. 유독 인영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뒤흔든 날이기도 했다. 아무리 노력했어도 그 날은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건의 내막은 당일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인영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해머를 내린 채 격납고 건물 밖을 내다본다. 오전 10시가 지났건만 주변에는 여전히 인적조차 없다. 시각에 와 닿는 파란 강물의 색채가 섬뜩할 지경이다. 백사장 건너편으로 호수처럼 광막하게 드리워진 남한강이다. 아무래도 강물의 퍼런 색채가 자꾸만 내 마음을 흔든다. 마치 팔뚝의 정맥을 연상시키는 듯하기 때문이다.
팔뚝을 절개하려는 듯 서슬 퍼렇게 창날에게 달려들던 연변의 사내였다. 40 중반의 왜소한 골격의 사내에게 어쩜 그런 괴력이 실렸던지? 나의 뇌리에 연상된 단어는 ‘전설적(傳說的)인 무사(武士)’였다. 당시에 나는 창날은 물론 사내의 정체마저 몰랐다. 사내를 처음 본 거였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인영을 통해 연변의 사내인 줄 알게 된 거였다.
어디선가 부르릉거리는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점차 소리가 높아지는 게 백사장으로 착륙할 모양이다. 양평의 남한강변을 따라 기다랗게 형성된 모래사장. 그 백사장이 경비행기들의 활주로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임시로 몸담은 곳은 경비행장에 딸린 격납고다. Y그룹에서 운영하는 민간 업체의 항공사 소속의 격납고다. 아니나 다를까 모래바람이 피어오르면서 경비행기 한 대가 착륙하는 중이다. 비행기 날개가 햇살에 반사되어 현란하게 반짝인다.
“남자란 운명조차 바꾸는 실체라는 걸 왜 몰랐어? 사타구니에 그것만 달렸다고 해서 남자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당신의 머릿속이 무지 의심스러워.”
사내가 풍향루(風向樓)에서 내게 던진 말 조각이었다. 이 말로 인해 나는 며칠간을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강남의 은하주점에서의 일이었다. 당시의 인영은 25살의 연변 출생의 주점 도우미였었다. 주점에서 소란이 일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늪지대에서 길짐승들의 자취가 사라지듯 잠적해 버린 인영이었다. 인영을 찾아 사방을 헤매던 중에 사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내는 서울 강남의 풍향루로 나를 불렀다. 풍향루란 단어부터가 왠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바람의 방향이 잡히는 누각이라? 그런 누각은 아마도 전설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다.
정오 무렵에 나는 사내랑 밀실에서 만났다. 풍향루는 인천의 중국인 거리에서나 볼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40 중반의 왜소한 골격의 사내였지만 눈빛만은 범상치 않았다. 사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야, 네가 신용태냐? 인영한테서 얘기는 많이 들었어. 헌데 왜 인영을 제대로 붙잡지 못해 쩔쩔 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잘 안 돼. 어디 시원하게 얘기나 좀 해 봐.”
이전부터 인영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다. 인영에게는 무술 도장(武術道場)을 운영하는 사촌 오빠가 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인영과는 절친하게 지내오던 사이라고 했다. 나는 사내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사내가 인영의 사촌 오빠임을 알았다. 은하주점에서 무술을 펼치던 사내는 당시에 낯선 폭력배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사내와 인영이 연결 고리로 맺어져 있을 줄은 몰랐다. 나로서도 인영의 실종으로 몹시 불안을 느끼던 터였다. 그래서 나의 속마음을 얘기했다.
“사실은 강남의 주점에서 인영이 실종되었거든요. 실종된 날 이후로 저는 사방으로 인영을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찾을 길이 없던 차에 연락받고 여기로 왔어요."
사내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영의 행적에 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인영이 주점의 도우미로 일하던 그 날 밤이었다. 도우미를 불러 함께 유흥을 즐기던 7명의 사내들은 폭력배들이었다. 이들은 인천파와는 경쟁 관계에 있던 용인파의 패거리들이었다. 용인파의 패거리들이 유흥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주점에 들렀던 인천파의 폭력배 중의 하나가 용인파의 사내들과 맞닥뜨렸다. 그러다가 시비가 벌어져 인천파의 패거리들을 부른 거였다. 곧바로 인천파의 폭력배들이 들이닥쳤고 주점은 인천파의 폭력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인영은 곧장 주점을 빠져 나갔다. 마침 그 날이었다. 사내는 어떤 의논할 일로 인영을 찾아 간 거였다. 그러다가 주점에서 난동이 일어나자 사내가 인영을 구한 거였다. 묘한 것은 난동이 일어나던 날 나도 인영을 찾아간 점이었다. 주점에 닿아 인영을 찾으려고 종업원에게 막 물어볼 찰나였다. 느닷없이 몰려든 인천파의 패거리들이 주점의 기물을 부수며 난입한 거였다. 나는 폭력배들의 난동에 어쩔 줄을 몰라 신속히 몸을 피했다. 몸을 숨기는 과정에서 인천파 패거리들이 휘두른 병에 살갗을 찢겼다. 당시에는 영문도 모르게 살갗을 찢겼을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영을 통하여 사건의 경위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난입한 폭력배들이 인천파라는 사실까지도. 내가 몸을 사렸던 그 시간에 사내는 인영을 폭력배들로부터 구했다. 사내는 왜소한 외모와는 달리 쿵푸의 달인이었다. 사내는 한 때 연변에서 도장을 차려 무술을 지도했었다. 주점 난동이 있던 날 이후부터였다. 그녀는 사촌 오빠가 있는 풍향루로 거처를 옮겼다. 폭력배들의 난동으로 인해 인영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주점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풍향루에서 음식 배달 도우미로 일하기로 작정했다. 인영은 마음이 안정되자 사내를 통해서 나를 부른 거였다. 당시에 나는 인영이 사내로부터 구출된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인영의 행적을 몰라 줄곧 가슴을 졸이고 지내던 터였다. 사내가 들려주는 얘기를 통해 나는 사건의 전말을 확실히 알았다.
사내가 인영보다는 먼저 연변을 떠난 거였다. 그리하여 강남의 번듯한 음식점인 풍향루의 주인이 되었다. 사내가 자리를 비키면서 인영이 밀실로 들어섰다. 반가운 마음에 둘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인영은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용태야, 그간 몹시 보고 싶었어.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 오늘까지 기다렸어.”
인영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나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폭력배들이 들이닥쳤던 날 밤에 무기력하게 나만 피신했던 정황 때문이었다. 내가 몸을 피하지 못했더라면 폭력배들에게 살해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 날 밤만 떠올리면 가슴이 부들부들 떨린다.
경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선 뒤다. 조종사인 형주와 승무원인 용재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게 보인다. 그 뒤로 3명의 고객들이 내린다. 경비행기를 고객들이 몰 수 있게 형주와 용재가 지도하는 중이다. 근래에 경비행기를 몰겠다는 사람들의 신청이 부쩍 늘어난 상태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늘을 날겠다는 인간의 생각은 어디로부터 발원된 것일까? 하늘의 새가 날아다닌다고 해서 괜한 부러움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리라. 새의 날개에 생각이 미치자 인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인영은 2년 전까지는 중국의 연변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동북사범대학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재원(才媛)이면서도 수려한 미모의 여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동북사범대학의 체육학과의 교수다. 1남 1녀의 장녀로 태어난 인영이다. 인영은 점차 연변의 경제적 가치에 눈길을 돌렸다. 교사로서 받는 급료가 다른 직업의 수익보다 별로 높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을 오가던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연변과 한국의 화폐 환율의 차가 크다는 거였다. 경제적인 척도로는 무려 100배가량의 차이가 났다. 예컨대 한국에서의 십만 원은 중국에서는 천만 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인영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냥 교사로서 일생을 편안하게만 지낼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보다 윤택하게 살 것인지를? 그러다가 소시민적 안일함보다는 경제적인 윤택에 관심이 기울어졌다.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인영은 그녀의 아버지의 견해를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속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편이었다.
“얘야, 나는 네가 커다란 새처럼 세상을 넓게 살기를 바란다. 네가 원하는 어디에 가서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래.”
그래서 그녀는 2년간의 교사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건너온 거였다. 한국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종로의 중국어 학원을 찾았다. 거기에서 중국어 강사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어 보려 했다. 2달간 강사로 일하면서 다른 경로도 부단히 알아보았다. 음식점 배달 도우미나 노래방 도우미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의외로 노래방 도우미들의 소득이 중국어 강사보다는 월등히 높음을 알았다. 인영의 궁극적 목표는 나중에 윤택한 삶을 사는 거였다. 윤택한 삶을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인영의 관심은 노래방 도우미 쪽으로 쏠렸다. 원래 선천적인 미모와 미성(美聲)을 갖춘 인영이었다. 게다가 25살의 여릿여릿한 나이라 늘씬한 몸매마저 받쳐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노래방 도우미로서의 삶은 인영에게는 환상적인 세계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손님들의 애무의 손길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가 금세 친숙하게 적응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의 팁을 자유로이 얻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상응하여 속살로 파고드는 애무의 손길마저 흔쾌히 허용하기로 했다. 인영에게는 관점의 변화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내가 서울의 독산동에서 인영을 처음 만났던 것은 2달 전이었다. 인영으로서는 한국에 온 지 5개월째에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2년째 직장다운 직장을 못 구하여 헤매던 나였다. 임시로 카센터의 견습 수리공(見習修理工)으로 일하면서 때때로 노래방을 찾던 나였다. 인간은 근원적인 외로움을 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는 술과 노래가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가슴에 외로움이 차오를 때면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었다. 취기로 전신이 얼얼해질 때면 자신도 모르게 노래방으로 발걸음이 내달았다. 그러다가 노래방 도우미로 나선 인영을 만나게 되었다.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애무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인영이었다. 인영이 노래할 때면 나는 언제나 그녀의 전신을 어루더듬었다. 몇 번을 만난 뒤였다. 마음이 통하여 모텔에서 서로의 알몸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인영은 나한테 몸을 처음 개방한 거였다. 처녀막이 찢겨 자신도 모르게 내지르는 비명과 시트 위의 혈흔들. 문득 내가 커다란 죄를 지은 느낌이 슬그머니 들었다. 어쩌면 인영을 내가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생겼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그녀와 내가 만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둘은 서로에게 심리적 치료사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40대의 사내들인 형주와 용재가 격납고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건넨다.
“이 사람아, 좀 쉬어 가면서 해.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컨디션 조절도 해야지. 몸이 탈나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밝은 목소리로 즉시 응답했다.
“이렇게 걱정해 주고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마워요.”
오전에 평탄화 작업을 마친 두랄루민 금속판만 해도 2톤 분량이다. 내 팔뚝은 목표량을 채운 기쁨으로 들떠 있다. 하지만, 마음은 안개 터널에 묻힌 듯 답답하기만 하다. 형주와 용태는 나를 격려해 주는 마음이 따스한 사내들이다. 항시 자신의 업무는 최대한 성실히 해내는 사람들이다. 두 사내와 함께 커피를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 때 핸드폰이 울어댄다. 잠시 일어나 격납고 밖으로 나와 통화를 한다. 목소리가 한없이 매끄러운 인영의 음성이 흘러내린다.
“지금 뭐 해? 헬스장을 들러 집으로 가다가 전화했어. 일이 안 풀려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수록 마음을 편히 가다듬는 게 중요해, 알았지?”
나는 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마음을 편히 가다듬는 게 중요하다고? 종택과 선영은 여전히 입원한 상태로 치료를 받는 중이다. 둘에게 들어가는 게 모두 나의 보험료라서 심리적인 압박감이 느껴진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돌아오니 형주와 용재는 본관으로 가 버렸다. 격납고 내의 수리 대상의 엔진을 둘러본다. 엔진의 수리는 1급 정비사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힌 견습 수리공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노후한 엔진의 수가 7개에 이른다. 엔진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다. 동물의 심장 역할을 하는 엔진이 아닌가? 동물의 심장을 생각하다가 서울 이태원의 그린 바(Green Bar)를 떠올린다. 지난 2달간 내가 몸담아 일하던 곳이다. 정식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잠시 스친 곳이다. 주로 미군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들락거리는 서양식 주점이다. 내가 맡은 일은 주문 좌석에 술병과 안주를 나르는 일이었다. 중앙 무대에는 조명 및 음향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bar)에는 외국인 남녀가 어울려 들어오곤 했다. 제일 골치 아픈 건 외국인 여자들끼리 몰려오는 경우였다. 여자들 중에는 미국인이 압도적이었지만 러시아 여인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쉬베르슈트(Schbershut)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첫눈에 매혹될 정도의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였다. 조화롭게 자리 잡힌 이목구비와 고운 살결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쉬베르슈트는 3명의 젊은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 쉬베르슈트가 돌연히 나를 불러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호스트 중에서는 제법 반반하게 생겼네요. 이리 와서 잠깐만 얘기해요.”
대학 시절에 취직을 대비하여 어학은 신경을 써서 닦았던 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연스레 영어로 응답했다.
“내부 규정상 호스트는 손님과 식탁에 함께 앉을 수는 없어요. 정히 대담을 하고 싶다면 연락처를 알려주세요. 퇴근한 뒤에 제가 연락드릴게요.”
그런 뒤에는 평소대로 손님들에게 술병과 안주류를 부지런히 날랐을 따름이다.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 퇴근한 직후였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폴더를 여니 쉬베르슈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10분이었다. 쉬베르슈트의 제안으로 골목 안의 카페에 들러 대화를 나누었다. 영어의 어휘에 신경을 쓰며 조심스레 대화를 나누었다. 쉬베르슈트는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림동의 S대학의 사학과로 유학을 왔다. 만주 지역의 역사에 관해 공부할 작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한 터였다. 쉬베르슈트의 대학 전공과목은 동양사(東洋史)였다. 중국 동북부의 고대사에 커다란 관심을 가진 그녀였다. 그리하여 신림동의 S대학에서 심화된 공부를 하겠다는 거였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한국에 온 지 2년째였다. 나의 관점으로 그녀는 영어에 능통한 편이었다. 나의 어휘력으로도 둘의 의사소통에는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은 뒤였다. 나에 대해서도 얘기해 달라는 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취직을 하고자 했으나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었다. 서울에 존재하는 3류 대학 출신의 나로서는 취업이 난감하기만 했다. 대개는 서류 심사에서부터 탈락되기 일쑤였다. 용케 연락이 와도 입사 시험을 치르기가 두려웠다. 경쟁률이 너무 높아 합격할 확률이 너무나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대학을 졸업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취업하지 못했다. 내가 말하는 취업이란 직장다운 직장을 말함이었다. 아무나 잠시 거쳐 가는 임시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거친 일자리란 것을 떠올려 보았다. 바의 호스트, 카센터의 견습 수리공, 공사 현장의 일용직 노무자. 이런 부류가 내가 거친 일자리들이었다. 쉬베르슈트를 만날 때의 나의 일자리는 바의 호스트였다.
쉬베르슈트는 나의 정황 설명을 듣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물었다. 빨리 정식 일자리를 찾기 위한 전략을 세우라고도 했다. 나는 남들이 나의 일에 촉각을 세워 근심하는 걸 싫어한다. 이것은 나의 성향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첫 만남은 가벼운 대화로 마무리 짓고는 헤어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날은 차가운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고 밤은 깊었다. 카페의 분위기마저 아늑하여 3살 아래의 그녀가 한없는 친밀감으로 다가왔다. 첫 만남이었지만 둘 사이엔 따사로운 정감이 점차 고조되었다. 언어의 소통이 자유로운 만큼 정감의 교류마저도 막힘이 없었다. 둘은 연이은 칵 테일로 일어서지 못할 만큼 취해 버렸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육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둘은 인근의 모텔을 찾아가 서로의 육체마저 개방했다. 그 날 이후로 쉬베르슈트와 나는 수시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육체에 대한 욕정을 화끈하게 태우기를 즐겼다. 아무래도 신기한 일이었다.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뒤엔 국적은 아예 염두에도 없었다. 그녀가 러시아인이어서 내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후련하게 대화하고 색욕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는 환상적인 상대였다. 적어도 쉬베르슈트와 함께 있기만 하면 인영까지도 잊을 정도였다. 내가 누릴 만한 최상의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여인. 쉬베르슈트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여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금기시하던 양다리 걸치기를 어느새 내가 저지르고 있었다.
격납고 내의 전화기가 크게 울어댄다.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니 항공사 본청의 청장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신군, 잠시 본청으로 좀 올라와 봐. 할 얘기가 있어.”
오토바이를 이용해 본청 건물까지 곧바로 달려간다. 건물 중앙의 청장실로 들어선다. 50대 후반의 청장은 커다란 체구처럼 마음씨도 후덕한 사람이다. 청장의 얘기는 나에 대한 배려 사항이다. 꾸준히 6개월만 격납고에서 일하면 안정된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격납고를 찾은 게 아닌가? 그런데 평생을 항공사에 몸을 의탁할 생각은 솔직히 없다. 그래서 최대한 예의를 다해 정중히 거절한다. 청장은 예상 밖인 듯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혀를 찬다. 그러더니 회전의자를 돌리며 나가도 좋다는 뜻의 손짓을 한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격납고로 향해 달린다. 격납고와 본청 건물은 오토바이로도 2∼3분가량 달려야 한다.
오토바이를 달리면서부터 인영을 만났던 사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쉬베르슈트를 만나면서부터 인영에게 전화하는 빈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줄어들었다. 인영의 여성적인 날카로운 감성이 즉각 반응하기 시작했다. 인영은 내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느냐며 윽박질렀다. 처음 몇 차례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걸핏하면 인영이 윽박지르는 통에 오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원래의 정황보다 부풀려서 쉬베를슈트와의 교류 관계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인영의 표정이 하얗게 바래지더니 그녀는 입술을 다물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깊은 궁리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랬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쉬베르슈트에게 돌발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아무래도 인영이 쉬베르슈트로부터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컸던 모양이었다.
인영이 신림동 S대의 외국인용 기숙사를 찾아든 거였다. 밤 9시에 쉬베르슈트의 숙소의 초인종을 눌러대었다. 쉬베르슈트가 의아한 낯빛으로 숙소의 출입문을 여는 찰나였다. 인영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쉬베르슈트를 밀치며 쉬베르슈트의 숙소로 들어섰다.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쉬베르슈트가 핸드폰에 손을 갖다댈 때였다. 인영이 날렵하게 쉬베르슈트의 손목을 쳐서 그녀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난 뒤였다. 인영은 쉬베르슈트를 방바닥에 쓰러뜨리고는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인영이 어쩔 줄 모르며 고함을 내지를 때마다 따귀를 갈겼다. 쉬베르슈트는 인영 때문에 고함도 내지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쉬베르슈트는 소리 없이 훌쩍거리면서 인영에게 몸을 내맡겼다. 잠시 후였다. 쉬베르슈트는 알몸이 된 채 인영에 의해 무릎을 꿇리게 되었다. 그런 쉬베르슈트를 바라보며 인영도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인영마저 옷을 벗기 시작하자 쉬베르슈트는 자지러질 듯했다. 인영을 말로만 듣던 동성 연애자로 착각하게 된 터였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가슴을 떨며 숨소리마저 죽인 채 쉬베르슈트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2여인은 알몸으로 꿇어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인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기 드물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인영이었다.
“넌 뭘 믿고 신용태 씨와 가깝게 지내는 거니? 지금 우리가 왜 발가벗고 있는지 알기나 해? 인간 대 인간끼리 진솔하게 대화하자는 뜻에서야. 또 다른 측면은 뭔지 알아? 내 몸매가 결코 네 것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그러니 나를 동성 연애자로 오해하지는 않아도 돼. 그건 그렇다 치고 너는 그를 애인으로 사귀었니? 설사 그랬다 치더라도 이제부터는 안 돼, 알았어? 왜냐구? 신용태 씨는 내 애인이니까 말이야. 내 말을 무시하고 까불면 가만 안 둘 거야. 대답하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인영으로부터 연속적으로 따귀를 맞은 쉬베르슈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인영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간 인영과 알몸으로 대치하던 쉬베르슈트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인영을 껴안았다. 인영을 껴안음으로써만 인영으로부터 공격을 면해 보려는 의도였다. 내재된 폭력을 한없이 행사하려던 인영은 쉬베르슈트의 태도 변화에 당황했다. 찰나간에도 섬광처럼 교차하는 것이 여인들의 심리 상태인 듯했다. 인영은 쉬베르슈트에 관한 무한 보복의 심정을 추스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인영 자신을 껴안는 쉬베르슈트의 손길이 따사로웠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위기 모면의 미봉책으로는 보이지 않는 면모마저 보였다. 그랬기에 인영의 표정은 창졸간에 놀라움으로 그득했다.
쉬베르슈트는 불청객인 인영의 내습에 넋이 달아날 정도였다. 게다가 인영의 주먹질은 모질기만 했다. 인영의 동작을 제어하지 않으면 피해를 얼마나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위기에 처하여 예상치 않게 인영을 껴안아 버린 거였다. 인영을 껴안아 잠시 위기를 모면한 쉬베르슈트의 내면은 급격히 떨렸다.
‘이 여자가 언제 발작을 할지 대책이 없네? 지금 신용태 씨는 어디에 있는 거야? 불안해서 미치겠네, 정말.’
한편 인영의 마음도 미묘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당초에는 가차 없이 쉬베르슈트를 두들겨 패 줄 작정이었다. 그랬는데도 쉬베르슈트가 자신을 껴안자마자 생각이 달라진 거였다. 그러면서 인영은 내면으로 중얼댔다.
‘이 여자가 나와 신용태 씨 사이에 왜 끼어들었느냐고? 눈치가 있어야지 남의 애인을 가로채려는 심보가 뭐야? 마구 혼내 줄까 했는데 나를 끌어안았으니 일단 용서해 주어야지. 하지만 따끔한 경고는 해 주어야지.’
이렇게 2여인이 알몸 상태로 대화를 나눌 때였다. 나는 오전에 찍혔던 쉬베르슈트의 전화번호에 통화 버튼을 눌러댔다. 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서너 차례나 눌러 봤는데도 응답이 없기에 그녀의 기숙사를 방문했다. 초인종을 눌러 기숙사를 찾았을 때는 진풍경을 접하게 되었다. 알몸으로 마주 앉은 2여인들의 정경. 생각할수록 온 몸이 쩌릿쩌릿하는 기묘한 장면이었다. 내가 2여인에게는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입은 있어도 말 못하는 짐승의 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토바이의 가속 페달만 세게 밟아 그녀들 곁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뒤였다. 그 날의 정황은 차례대로 두 여인과 통화하여 알게 되었다.
오토바이에 내려서서 다시 격납고 안으로 들어선다. 대졸 이후 2년간 제대로 된 취업도 못한 나의 존재란? 취업을 못한 게 안타까운 게 아니다. 남들과 경쟁을 끔찍이 두려워하는 나의 내면이 두려운 거다. 격납고 안에서 내가 할 일이란 게 뭔가? 두랄루민 몸체만 다듬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가슴이 타는 것이다. 차라리 연변에서 온 인영의 처지가 부럽다.
교사로 취직되었음에도 훌훌 떨쳐 버리고 한국으로 오지 않았는가? 나는 그녀의 결단이 부럽고도 두려운 거였다. 한강의 황홀한 불빛 아래에서 숱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애잔한 날이면 모텔에 들어서서 뜨겁게 애무를 해댔다. 그랬는데 내가 쉬베르슈트와 양다리를 걸치다가 인영과의 관계마저 뒤틀리게 되었다. 인영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가 여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쉬베르슈트는 인영으로부터 엄청나게 혼이 난 탓이었으리라. 쉬베르슈트는 인영을 만난 이후부터는 나와 통화하는 것마저 거절하려고 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으려다가 다 놓친 꼴이 돼 버렸다.
양다리를 걸쳤던 원인은 내 가슴이 공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안정한 직장에 취업되기만 했어도 그런 현상은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나 자신의 위치가 불안하기에 부수적인 바람기가 작용한 듯하다. 행정고시의 응시나 취업 재도전에 대한 결단. 이런 결단의 시간을 미루다 보니 격납고에서 해머질만 해댈 뿐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현기증을 느낄 만큼 숱한 섬광에 시달리면서까지.
나도 격납고에서의 생활에 못 견뎌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굽이치는 남한강을 굽어보며 마음을 쓸어내리곤 했다. 전망이라고는 도무지 안 보이는 삶에 갇힌 현실이 애달팠다. 가슴 속의 마음을 호소할 진실한 상대가 없는 것도 애달팠다. 나에겐 인영도 쉬베르슈트도 낯선 이방인으로만 여겨졌다. 내가 딛고 선 현실이 불투명한 상태라 매사에 울분이 들끓었다. 그런 나의 울적한 심사를 귀신같이 간파한 여인은 인영이었다. 내가 쉬베르슈트와 인영과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기 전의 어느 때였다. 인영은 진심으로 나를 필요로 한다고 호소했다. 그런 그녀마저도 나는 흔쾌히 맞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든 게 내면의 울화 때문이리라 여겨졌다. 그 불투명한 공간을 해부도처럼 파고든 시린 시간의 자취가 있었다. 마냥 시리기만 한 시간의 자취가 말이다. 허리가 시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내의 시린 정한을 그 누가 알았을까? 나날이 남한강에는 강바람이 드세어지고 그런 뒷날에는 모랫더미가 높아졌다. 젊은 나이에도 생존의 공간에 진입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나였다니? 생각할수록 발광할 것만 같았다. 차라리 미쳐 버리고도 싶었다. 어느 날 나는 거울을 보고 울먹였다. 그 누군가 나를 격납고에서만 해방시켜 준다면? 나는 창공을 나는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리라고 울먹였다.
나에게도 그러한 날이 의외로 빨리 다가올지도 모르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일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죽음 같은 현기증에 허덕이면서 나는 현실의 광기를 흡수하고자 한다. 확실히 그런 상태다. 그건 현실의 껍질을 벗기는 광기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미래의 기대로 답답한 현실을 달래며 울음을 삼킨다. 아니 반드시 울음을 삼켜야만 하리라 믿는다.
내가 S대 기숙사를 떠난 지 며칠 지난날이었다. 언젠가는 인영이 내가 머무는 격납고에도 찾아드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어떤 마음의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유사시에는 언제든 내가 머물던 격납고를 떠나 버리겠다고.
오늘 새벽 무렵에 걸려온 인영의 핸드폰 통화에서였다. 인영의 목소리는 의외로 쾌활했다. 마치 봄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의 목소리처럼 밝았다. 그랬어도 묘한 어떤 두려움 같은 게 내 가슴에 일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나의 뇌파가 인영의 머릿속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격납고를 벗어날 마음이 꿈틀대었다.
오전 10시경부터 이상하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마음이 불안했다. 마음을 추스르며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다. 부르릉거리는 용달차의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인영이 격납고로 들어선다. 용달차는 인영 혼자 운전해 온 터다. 용달차에는 20 L 들이 하얀 플라스틱 통이 6개 실려 있다. 플라스틱 통의 용도나 내용물에 대해선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인영이 용달차에 내리자마자 나는 다소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는 어떻게 알아냈어? 구체적인 장소는 네게 알려준 적이 없잖아? 나한테 올 것 같으면 연락이라도 좀 하지 그랬니?”
인영은 나의 말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한 듯 응답한다.
“왜 내가 못 올 곳을 왔어? 격납고 위치 정도야 인터넷 지도를 더듬으면 금방이야. 근데 너는 내가 반갑지도 않은 모양이지? 왜 표정이 이렇게 굳어 있니? 좀 상냥하게 대해 주면 덧나니?”
내가 막 뭐라고 대꾸를 할 찰나다. 인영의 몸에 내재된 광기가 발동함일까? 인영이 덩그렇게 치솟은 격납고 천장을 향해 느닷없이 고함을 질러댄다.
“산다는 게 별 거냐?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산단 말이야!”
인영의 고함소리를 들은 직후다. 묘하게도 내 마음도 걷잡을 수 없이 술렁대기 시작한다. 마치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인영의 돌발적인 행동까지 다 예견된 듯한 느낌으로 밀려든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디든 정착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내 마음이 인영을 부른 것일까? 어떻게 인영이 오늘 오전에 격납고를 찾을 생각을 했을까? 두랄루민을 두드리는 해머에 힘이 실리지 않았던 근원도 불안감 탓이었을까? 어떻게 내 불안감을 인영이 간파한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내가 잠시 생각의 굴레에 얽혀 있을 때다.
인영은 마치 신들린 듯 서너 차례 고함을 더 지른다. 그런 직후다. 인영은 폐비행기의 엔진 부위에 투명한 액체를 들이붓는다. 20L(리터) 들이 플라스틱 통에 든 액체를 붓는 거다. 이전에는 못 보던 플라스틱 통이다. 아마도 인영이 용달차로 싣고 왔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녀가 플라스틱 통에서 내리붓는 것이 단순한 물이려니 짐작한다. 그래서 그냥 넋을 잃은 채 그녀의 동작을 지켜만 본다. 7개의 엔진마다에 그녀는 끈기 있게 액체를 들이붓는다.
내 마음에는 인영의 행동을 제지할 여력이 없다. 나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인영이 격납고에 와서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무엇이 인영의 마음을 저다지 술렁이게 만들었는가? 답답한 마음 중에서도 집히는 게 있다. 내가 러시아의 쉬베르슈트와 가깝게 지내는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인영이 느낀 건 사랑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마음을 자각한 순간부터였으리라.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S대 기숙사로 달려갔으리라. 나의 추측이 옳다면 인영의 상실감이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듯하다. 그랬기에 양평의 격납고까지 들이닥친 것이리라. 인영의 마음이 미쳐 날뛰기 전에 달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내면에서는 비릿한 반발심이 치솟는다. 내 운명의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달래기는 누구를 달래?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어쩌다가 벼랑에 떠밀리듯 위기 상황에 빠졌을까? 지금이라도 나를 도약시킬 길은 없는가? 머릿속으로 떠올려 봐도 길은 한없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헤어날 전망이라도 아예 없다면 차라리 위안이 되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핑계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핑계거리로 나의 무력감을 달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주위엔 도약의 길이 허다하게 널브러져 있다. 세상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가슴만 탈 뿐이다. 선뜻 어떤 길에 뛰어들지 못하는 나에게는 변명할 안식처가 필요하다. 정말 간절하고도 애타는 안식처가 있기는 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 회화 능력까지 갖춘 내가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취업의 문은 좁으니 도전하여 좌절할 일이 끔찍스럽다. 도전하는 게 어려운 아니라 실패한 뒤에 겪을 좌절감이 두렵다. 어디 한두 번 좌절했어야 말이지? 좌절할 때마다 피눈물을 쏟을 듯한 아픔을 그 누가 이해하랴? 주위에서 이해해 준다고 내 마음이 가볍겠는가? 생각 같아서는 연이어 행정고시건 사법시험이든 도전하고도 싶다. 행정고시는 이미 3차례나 응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건 처절한 실패일 뿐이다. 실패의 좌절감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생각 같아서는 옷을 훌렁 벗은 채 도로를 내달리고 싶다. 싶게 말해서 발광이라도 할 듯한 심정이다. 좌절감이 쌓인 나에게 재도전이란 참으로 끔찍한 일로 여겨진다. 머릿속으로는 실패도 이해가 되고 좌절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실패감은 그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새 얼굴에 두려움이 일렁임을 느낀다. 나의 얼굴 표정부터가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탓에 자지러질 듯하다. 살아가면서 항상 성공할 수야 없다는 것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패할 때 겪는 좌절감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이론과 실제는 너무나 다르기에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내 마음이 왜 이리 약해졌을까? 내 약해진 마음을 어느 누가 달래줄 것인가? 달래 주기는 고사하고 아픈 마음을 건드리지만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나 자신이 그 무엇이 되든 내버려 두었으면 좋으련만.
인영이 7개 엔진 모두에 액체를 부은 직후다. 그 때까지도 나는 생각에 잠겨 냄새를 맡지 못했나 보다. 진한 유기 용매의 냄새가 후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 때에야 비로소 플라스틱 통 속의 액체가 에탄올임을 확인한다. 바로 그 순간이다. 그녀가 화살촉에 솜뭉치를 꽂고는 불을 붙인다. 불길이 치솟자마자 그녀는 활로 불타는 화살을 엔진으로 날리려고 한다. 나는 단숨에 인영을 밀어 넘기고는 화살의 불을 껐다. 그리고는 격렬한 동작으로 인영을 격납고 바깥으로 떠밀고 나간다.
나는 창졸간에 인영을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싣는다. 나의 짐 가방도 함께 싣는다. 그런 후에 잠시 격납고 안을 둘러본다. 적요롭기 그지없는 정경이다. 문득 인영이 몰고 온 용달차를 떠올린다.
“네가 타고 온 용달차는 어떻게 된 거니?”
인영은 남의 얘기를 들려주듯 대답한다.
“길가에 시동이 켜진 채 세워져 있기에 그냥 몰고 왔어. 운전사가 에탄올 통을 배달하느라고 잠시 자리를 비웠나 봐. 그냥 내버려도 돼.”
나는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어 고속 주행을 시도한다. 동료 작업원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다. 어쩌면 평생 다시는 못 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는 동료의 귀환이나 잠자코 기다릴 처지가 아니다. 나는 인영을 오토바이의 뒷자리에서 나를 끌어안게 한다. 그런 뒤에 오토바이의 시동을 켜고는 헬멧을 쓴다. 이윽고 가속기를 밟으며 오토바이를 강변의 백사장으로 돌려 내달린다.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기분이다. 백사장을 가로지를 때다. 인영의 손길이 나의 상반신을 더듬어 내려온다. 그러다가 혁대 언저리에서 파들파들 떤다. 나는 더욱 가속 페달을 밟으며 백사장을 전속으로 질주한다.
이 때다.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스며든다.
“용태 씨! 나만 사랑하면 안 돼? 왜 나를 화나게 만들어?”
인영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갑자기 서글퍼진다. 상실감과 공허감 때문에 격납고에 불을 지르려 했던 그녀가 아닌가? 뭔가 따스한 말로 달래 주어야겠는데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 처지가 너무나 암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인영에 대한 대답 대신 엉뚱하게 가속기 페달에 힘을 가한다.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력까지 가속기 페달을 힘껏 밟는다. 그러자 굉음을 토하며 폭우를 가로지르는 섬광처럼 오토바이가 백사장으로 내닫는다. 이제 머릿속에는 일체의 상념이 사라진 듯하다. 순간적으로 텅 빈 듯한 느낌이 밀려들며 머리가 개운해진다. 새로운 삶의 돌파구가 보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점차 사방에서 모래바람이 짙게 피어오르며 오토바이가 쾌속으로 질주한다. 이전에는 미처 느껴 보지 못했던 쾌감이 전신으로 밀려든다. 오로지 귓전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만 드높다.
<끝>
(200자 원고지: 90매)
